하나님께 더 가까이 시 73:26-28. 2022. 1/2. 주일 설교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올해 한해에도 좋으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무궁하신 은총이 세초부터 세말까지(신 8:12)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라는 표어를 생각하며 이 세상 바다와 같은 요동치는 인생 행로를 항해하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시작이요, 반은 반이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과장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속담 속에는 시작하기 전 어려운 결정에 대한 갈등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작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일을 해낸 것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게 되는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입니다. 두려워 마시고, 희망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한해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의 삶이 아닌 시작과 끝이 한결같을 수 있는 삶이 진실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시편 73장은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현대교회로 비유해보면 성가대장의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시험이 닥쳤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봉사를 했는데,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와 불평이 일어나던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성공도 출세도 아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이 시의 저자인 아삽은 다윗왕의 사랑받는 궁중음악인으로 왕과 권력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왕의 남자였지만 그것이 인생의 문제의 해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 어느 날 주님 앞에 엎드려 이 시의 고백을 주께 드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 그러면 이 유명한 시편 73편을 통해서 인생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 - 그것이 왜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생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왜 중요한 일일까요?
1. 하나님을 멀리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주를 멀리하는 자를 다른 말로 ‘주를 떠난자’ 혹은 ‘음녀’라고 일컫습니다. 음녀는 성실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도 더 중요한 다른 무엇에 그의 가치와 사랑을 두고 사는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심지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대부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탕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 �리한다, 가까이한다는 공간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큰 아들을 보십시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가까이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하려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까이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말합니다. 그냥 교회를 열심히 다녀라, 봉사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면 시장의 시끄러운 골목길에서도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하는 삶은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요즘 스마트폰은 외국에서도 어디에서도 통화가 가능합니다. 제가 처음 백두산에 올라서 당시 삼성 애니콜로 서울에 있는 집에 통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는 데 마치 달나라에서 지구로 통화한 것 같이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산꼭대기에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 아삽을 보십요. 누구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아삽의 마음에 큰 고통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떠나 사는 이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3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어째서 형통하느냐는 것입니다.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사는 것도 건강함으로 잘 삽니다. 6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9절에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라고 표현합니다. 심지어 입술로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믿는 사람을 욕합니다. "하나님 섬겨서 잘된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무엇이냐?"고 비웃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11-12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13절에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어마어마한 위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었는지 15절에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자기 아들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는 말을 자기의 처지를 보니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인생 너희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삽은 비록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아픔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신앙의 회의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단 이 문제가 아삽만의 문제입니까?
현대인의 대표적인 감정을 든다면 우울함과 두려움일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해 우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코로나’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일상 속에서 두려움을 계속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엔데믹(Endemic)’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처럼 우울함과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 감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상실로 인해 우울해집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거나 소중히 여기던 사람을 잃었을 경우, 우리는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당했을 때, 가족이 질병을 앓을 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때, 우울해집니다. 우울은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슬픔, 분노, 낙심, 좌절, 자기연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절망이 깊어지면, 무기력해집니다. 그리고 우울해집니다. 우울한 감정이 깊어지면, 우울증이 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합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2. 왜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합니까?
16-19절에 그의 인생에 반전이 시작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보세요. 아삽의 갈등과 고민이 어디에서 해결이 되었습니까? 바로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에서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아삽은 그의 문제 보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여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엇이라 고백을 합니까? 본문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세상도 보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누군가 소위 힘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기 대통령에 오를 유력한 사람에게 줄을 서기도 하고, 대통령의 친척들에게 줄을 서기도 하고, 대통령 고향 친구에게까지 줄을 서기도 합니다. 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줄을 서기도 하고, 동네 동장이나 이장, 반장에게 줄을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으신 분에게는 줄을 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현실을 보십시오. 모든 주권과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를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께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별로 힘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실세중의 실세로서, 세상의 어떠한 사람보다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줄을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히브리 성경을 보면 ‘엘로힘’(!yhilia>)으로 되어있습니다. 창1:1은 바로 엘로힘이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종종 위엄이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권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가장 힘센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엘로힘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하신 일입니다. 창1:28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엘로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축복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와 심판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3:33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시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로다” 징계가 본심이 아니고 축복이 본심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돌이킬 때마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지난후 엘로힘 하나님의 첫째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창9:1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축복의 사역이었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분의 축복을 누리며 그분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저와 여러분이 붙잡고 나아가야 할 일이 있다면 도대체 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3. 우리가 해야 할 일 - 복음 전파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이유-본문 28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그렇습니다. 여기 피난처는 ‘폭풍이나 전쟁의 때 보호를 위해 피하는 곳’을 말합니다. 이제 그는 성소에서 일어납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해야 할 일을 알게 됩니다. ‘주의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 사명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주의 일입니다. 이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위해 보내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덕분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가 결코 삶을 헛되이 살 수 없습니다. ‘주의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는 복음을 위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도 지난 해 큰 어려움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국가가 교회를 탄압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신앙의 형태가 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교회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는 오늘이라는 상황에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빼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교우들을 위해 인간적인 욕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힘을 모아 이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하도록 말입니다. 태풍이 불면 그 강한 바람에 배가 더 빨리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배는 좌초되고 맙니다. 지금은 우리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 지구촌에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고 싶으십니까? 나중에 우리의 후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는 평가는 결코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으로 먼 훗날 우리를 평가할 것입니다. 여기 아삽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기에 인생을 걸었다는’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는 참 멋진 신앙인으로 산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 그 사명을 위해 묵묵히 이 한해를 섬길 용의는 없는지요?
이제 사랑이신 주 여호와를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그 앞에 나아와 그가 베푸신 용서와, 그가 예비하신 위로와 안식, 그리고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조건 없는 사랑의 은총에 푹 빠져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경험한 그 황홀한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잠잠할 수 없거든 나아가 전하십시오.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이 구원의 감격을 담아 모두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이것만이 여러분에게 복입니다.’라고 외치십시오. 복음의 향기가 온 땅에 울려 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