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 내게 복이라 ② 시73:28, 시1:1-6. 2022. 1/9
지난해 11월에 추수감사절 특새와 2022년도를 준비하는 시간을 한 조용한 수양관에서 가졌습니다. 그때는 이제 ‘위드 코로나’로 간다고 정부가 발표한 시점이었습니다. ‘위드 코로나’라는 말은 말 그대로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독감 바이러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2022년도에 우리 교회의 사역들이 예전처럼 온전히 회복되진 않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회복되고 새롭게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있겠다고 생각되었고, 그렇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내년 교회에 새로운 방향을 가지고 목회 사역을 준비할려고 할 때에는 ‘위드 코로나’가 사라지고, 방역을 더욱 옥죄이는 상황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하루에 7000여명의 확진자와 위증증 환자로 이들을 수용하는 병실이 부족함으로 더욱 긴장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목회 구상 때 계획을 세웠던 것들을 전부 수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새해 계획을 세울 때마다 잠언 16:9절의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런데 올해는 유독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새해의 모든 일이 어둠 속에 갇힌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저에게 ‘앞서가지 말고 뒤 따라오면 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큰 위로였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표어 가운데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네 개 복이라’라는 말씀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사간으로 복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삶의 결과는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인데 ‘토브( טוֹב )’는 ‘좋다, 선하다,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이 복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사용한 팔복에 나온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산상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여덟가지로 말씀하는데 바로 아삽은 그 복을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자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힘든 한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1. 인생에 있어서 참된 행복이 어디에서 주어지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러실 겁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행복 추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권리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소위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의 인생을 구가하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나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처럼 행복을 추구하고 또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취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죄”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섹스를 추구하든지,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에서 ‘복’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신약에 예수님의 팔복에 복을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blessed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blessing 이라는 단어는 본래 앵글로 색슨 단어에서 blood 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피란 말이죠. 이 단어는 본래 피의 제사를 뜻하는 말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바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희생 동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구약의 피 제사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복은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인격 속에서 주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토브란 복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보세요. 여러분 사람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환경이 다 제각각입니다.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선택하지 않았고, 환경도 외모도 체질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님은 부자였고, 마침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고 거기다 부모님이 잘 생겨서 미남 미녀가 되어 미인대회에 나가 뽑히기도 합니다. 가정환경이 좋아서 복된 인생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로 주어진 좋은 조건 때문에 불행과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 박대통령의 아들 ‘지만 군’을 보고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라 했지만, 오히려 대통령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마음에 심한 좌절과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들을 겪고 마약에 손을 대고 사회 적응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까?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의 조건들이 행복의 진정한 조건이 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불행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유전자를 받아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조건이 더 복되고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이나 소유의 기준도 행위의 기준에 따름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침, 이미 남들이 말하는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분들, 그리고 좋은 조건으로 출발했지만 뜻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해하시는 분들, 내 인생과 행복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행복을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 복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아삽은 자신은 믿음으로 살아가려 하는데 주변을 보면 부조리한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아삽은 현대교회로 비유해보면 성가대장의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시험이 닥쳤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봉사를 했는데, 1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는 말씀처럼 괴로움을 당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괴로움을 당하는데, 주위를 보니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됩니다. 자녀도 잘되고, 사업도 잘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더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2절에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라고 실족할 뻔하였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실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어째서 형통하느냐는 것입니다.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사는 것도 건강함으로 잘 삽니다. 그래서 그들을 6절에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또 7-9절에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라고 표현합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믿는 사람을 욕합니다. "하나님 섬겨서 잘된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무엇이냐?"고 비웃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움 앞에 서서히 아삽은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13절에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어마어마한 위기입니다. 15절에 보면 경건한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마음의 이야기까지 토로합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아들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는 말을 그동안 해왔는데 자기의 처지를 보니 이젠 그 말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때는 어떻하든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말씀으로 가르치겠다는 그 열정이 식어버리고 쉽게 말하면 자녀에게 ‘네 믿음 니가 알아서 해!!’하는 자리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늘의 생수가 다 마른 또 하나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아삽의 문제만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영적 침체기의 터널 속에서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이애나 그루버가 쓴 『영혼의 밤을 지날 때』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사람들 가운데, 위대한 신앙의 업적을 남겨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일곱 명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틴 루터의 이야기는 영적으로 침체된 중세시대를 오직 믿음으로라는 로마서 말씀으로 세상에 진리의 등불을 밝힌 그였지만, 그도 깊은 영혼의 깊은 밤을 보낸적이 있습니다. 그의 딸이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 앞에 통곡을 하며 기도합니다. 결국 그 딸은 회복 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 때 루터는 그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지쳤어. 내 안이 텅텅 비어버린 느낌일세‘ 마틴 루터 같은 위대한 인물도 인생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의 아내에게도 ’세상이 너무 싫어‘ 하는 부정적인 고백을 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고, 동시에 도전도 받았습니다. 위로를 받은 것은 그렇게 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참 많은 아픔과 동시에 절망의 늪을 헤맬 때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도 한때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깊은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족적을 남긴 분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전을 받은 것은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어려움과 위기를 잘 버텨왔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인생의 전환이 어디에서 옵니까?
저는 본문의 아삽이 변한 현장이 어디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성소입니다. 바로 예배하는 현장입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끌어안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이 상처를 터뜨리기 전에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갑니다. 여기서 주의 은혜를 깨닫고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입니까? 아삽이 예배자로 엎드릴 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악인들의 최후는 미끄러져 파멸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한때 위기 앞에 방황하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22-23절에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자신의 이런 연약함을 방관하거나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넘어지는 연약한 자신이지만 미끄러지지 않게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일으키는 모습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성소에 들어간 것은 성도의 특권이요, 행복의 현장입니다. 예배는 성도들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성도의 모든 성공의 기초가 됩니다. 저는 새해를 맞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무엇보다 먼저 예배에 성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를 받으면 못 할일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봉사하면서도 쉽게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사역자와 모든 봉사자들이 먼저 제대로 온전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의 축복과 성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만나면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상황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자가 되십시오. 온전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행복을 누립니까?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축복은 받았는데도 가난하게 살고, 건강축복은 받았는데도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게 살고, 많은 지식의 축복은 받았는데도 무식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갑시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주님이 계십니다.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보일 것입니다. 새로운 한해 우리의 가는 길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내일 일을 우리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내게 주신 복을 깨닫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나를 맡기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답답하더라도, 때론 느리더라도 주님의 뒤를 따라 가십시다. 그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자’라는 고백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