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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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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 우리의 참된 피난처(3)" , 22.1.1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1-16 | 조회: 279

가장 안전한 피난처 시73:28. . 2022. 1/16

 

 

요즘 북한이 잇단 탄도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일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감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핵 대피 시설까지 갖춘 빌라가 생겼습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모 빌라에는 핵 대피 시설을 갖춘 지하 벙커가 있습니다. 벙커 입구 문짝은 1톤이 넘고, 벽두께는 일반 건물 벽의 4배나 된다고 합니다. 지하 4층에 위치한 이 벙커는 40여 평 정도에 50여 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가고 한 달 가량 살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만든 피난처입니다.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이처럼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피난처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어디론가 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락한 자리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노력하는 만큼 과연 우리에게 편안한 자리는 보장되어있는 것입니까? 세상은 변하는데 안전한 자리, 안전지대란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라는 표어를 붙잡고 지금 믿음의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복은 우리 삶의 태도를 통해 내가 그 복을 누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3번째 시간으로 피난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 피난처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피난처는 무려 시편에만 37번이나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피해야 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몸이 아파서 어디서 편히 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어딘가 따뜻하게 쉴 곳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때로 억울하고 답답하여 친정어머니에게 하듯 마음껏 속에 있는 것 이야기하고 실컷 울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단 하나의 확실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 지금 아삽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한 이 이야기는

 

 

1.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시인은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여기서 주님은 나의피난처라고 한 고백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라고 말하는 것과 주님은 나의피난처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주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통하여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46:1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죽거나 혹은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게 한 사람들이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약자나 곤경에 처한 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법적 장치가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제도가 도피성입니다. 한마디로 피난처입니다. 20:3절에 보면,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죽거나 혹은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제도가 도피성입니다. 이 도피성이 바로 피난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도피성은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첫째 누구나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뿐아니라 거기 거하는 나그네들까지 대상이었습니다. 대상의 제한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느 곳에서도 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에 3, 서편에 3, 모두 6개였습니다. 6개도 북쪽, 중앙, 남쪽에 각각 한 군데씩 만들어 아무나 가까운 곳으로 갈 수 있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아무 때나 열려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24시간 열려 있었습니다. 네번째 한번 도피성에 들어가면 석방될 때까지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도피성은 그곳에 거하는 자만 보호했습니다. 임의로 도피성을 떠난 사람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피난처는

 

 

2. 피난처는 회복의 현장입니다.

 

59:16절에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이심이니이다.’ 여러분, 이 피난처는 숨어지내는 장소만이 아니라 여기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신앙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여기 모인 성도들이 이 힘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비로소 안전한 자리를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골리앗과의 싸움을 비롯하여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입니다. 그의 시편을 보면 그 누구보다 힘들 때, 지쳐있을 때,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면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마땅치 않으면 망명의 길도 나설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광야에 숨어들어 사울의 손길을 피해 이 굴, 저 굴에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숨어 생활을 한적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피난처란 이름을 가진 아둘람 굴입니다. 그런데 이 굴에 모인 자들을 보십시오. 삼상 22:2절에 보면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피난길에 사람은 모였는데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 좀 멋진 사람들이 와도 힘든 판국에 자기에게로 몰려온 사람들은 오히려 다윗을 위로해 주기보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기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란한 마디로 인생의 패배자들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순종의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이것이 피난처인 아둘람의 비밀입니다. 다윗은 아둘람굴인 피난처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어둡고 고독한 굴속은 절망이 서려있지만, 바로 그속에 사람들은 절망과 탄식을 벗고 그 피난처 안에서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그들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빚을 지고 쫓겨다녔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피난처에서 자신들의 회복만 아니라 이 피난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묻습니다. 나의 피난처는 어디입니까?

 

 

3.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피난처이십니다.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십니다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초청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나를 초대하여 나의 인생의 짐과 내가 살면서 버거워하는 수고의 삶을 다 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기쁨의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42: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오실 메시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 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내 인생의 진정한 피난처이십니다. 나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께 내려놓기 바랍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제가 탄광 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주께 피하여 그 앞에 자신을 토로하는 자는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그러면 마음만 토로하면 됩니까? 그 앞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하신 주님은 친절하게 이렇게 덧 붙이셨습니다.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했는데 이 멍에란 단어는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동행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영원한 피난처로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초대하신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도, 놓치지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지금의 이 힘든 모든 문제를 피난처되신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피난처이신 주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피난처 되신 그 주님께 나의 삶을 맡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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