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더 가까이 – 전파하리이다. 시73:28. ④. 2022. 1/23. 완성
얼마 전 지방에 사시는 성도님 가정에 심방을 하고 올라오다 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의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그 화장실에는 변기 위에 좋은 글귀를 멋진 사진과 함께 적어놓았습니다. 무심코 읽어보고는 서울로 오는 내내 그 글귀가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톨스토이가 한 말인데 “삶이 힘들고, 사람이 무섭고, 인생이 뒤죽박죽일 때면 이렇게 다짐하라...” 뒷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고 이 앞부분만 생각이 났습니다. 마치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쓴 것처럼 제 심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목회하면서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 역시 코로나19로 극도로 예민할 때가 아닙니까? 교회 감염의 우려 때문에 모이지는 않죠? 여러 가지가 참 힘들 때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피하고 싶을 때였습니다. 게다가 뭐하나 계획대로, 생각했던 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다 뒤죽박죽인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마음 깊이 공감이 되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삶이 힘들고 사람이 무섭고 인생이 뒤죽박죽일 때” 혹시 지금 이런 상태는 아니십니까?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시편 73편의 내용이 바로 그런 절박한 내용입니다. 아삽이라는 시인 역시 삶이 힘들고 사람이 무섭고 인생이 뒤죽박죽일 때, 도무지 인간적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성소에 들어가 비로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여기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히브리 성경을 보면 ‘엘로힘’으로 되어있습니다. 창1:1은 바로 엘로힘이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종종 위엄이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권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가장 힘센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엘로힘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도 지난해 큰 어려움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국가가 교회를 탄압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신앙의 형태가 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교회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는 오늘이라는 상황에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능의 하나님의 품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이 땅이 주는 복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갈망하며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시대를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4번째 시간 으로 아삽이 성소에서 깨달은 진리는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아야 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성소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새해에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1.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20%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산다고 합니다. 10명 중 2명만 신앙생활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8명은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기보다는 그저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 단체는 발표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십니까? 진정 신앙의 감격이 있습니까?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감사가 있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하면 내 영이 열리고, 억지로 하거나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복음의 환희가 생깁니까?
우리가 왜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렸는가? 왜 감사가 넘쳐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의 내 환경이 얼마나 암담했던가를 하나님 앞에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 가운데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 자원봉사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8월의 하늘은 그 당시 불을 토해내는 것 같은 더위 속에 잠시 휴식을 갖게 되었고 우리 일행은 삼옥 2리라는 곳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참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남자 학생들이 강을 다 건너는 것입니다. 나는 별로 수영 체질이 아닌데 다 가고 나와 친구 전도사 한분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학생들이 격려를 하고 야단입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물갈퀴를 가지고 뛰어 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강을 중간쯤 가다가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몸이 굳기 시작하더니 강 한복판에서 강물에 휩쓸려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저의 친구 전도사 한분이 나를 보고 튜브를 가지고 헤엄을 쳐서 나를 건진 것입니다. 챙피도 하고 미안도 했는데 그리고 몇 년 후 영월을 가서 그 현장을 보게 되었는데, 얼마나 끔직한지 모릅니다.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씻벌건 황토물이 되어서 소용돌이를 치며 내려가는 그 광경을 본 순간 가슴이 메어지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질 당시는 잘 몰랐는데 범람하는 물줄기가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데 만약 그 때 내가 거기서 죽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엡2: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의 상태를 “죽었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입니다. 산송장입니다. 교회 밖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중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착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그들을 향해 감히 죽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표현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우리는 죽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사망한 자였습니다. 하나님, 영원한 생명, 그리고 저 풍성한 하늘의 축복과는 전혀 관계없이 죽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하늘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는 반응이 없고 썩어져 가는 존재, 그야말로 죽어 있었던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엡2:4절 이후를 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여기 ‘살리셨다’는 단어는 죽어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2.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상황을 진단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아삽을 보십시오. 그가 가졌던 가장 큰 고통은 관계에서 오는 상처였습니다. 이 시 73편의 구절이 28구절인데 상처를 담은 이야기가 무려 3/2가 나올 정도로 아삽은 관계에서 오는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본문을 보면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내 삶은 항상 징계 속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보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생은 속이 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순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삽을 보십시오. 얼마나 삶의 갈등이 많았습니까? 14절에서 아삽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날마다 종일토록 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하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의인은 고통 중에 있고 악인은 형통함을 누리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3절에서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하고 고백합니다. 즉, 악인의 형통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악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기에 아삽이 그토록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4-6절에 보면, 그들은 일평생 건강하게 살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이 죽고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일도 없고,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고 폭력을 써서 재물을 쌓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강포가 그들의 옷입니다. 그들의 말은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는데도 누구하나 잘못했다고 덤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아삽은 상처가 도진 것입니다. 1
6절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고통(苦痛)이 되었더니”하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몸과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 일어났겠습니까? 이는 비단 아삽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인간관계 속에서 오는 부딪힘 때문에 의외로 상처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상처가 쉽게 치유가 안됩니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견딜 수 없는 상한 마음을 갖고 그가 간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에 안겨 보니 세상의 것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사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사실보다 더 기쁜 것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품에 안겨 있으면, 젖먹는 어린아이가 그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음 같이(시편131:2) 세상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있으면 세상 그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와서 위협해도 두렵지 않고, 세상 그 어떤 부자가 와서 놀려도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지금 아삽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를 올가맸던 상처가 하나하나 아물어지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의 고통의 상처는 사라집니다. 그는 외마디 탄성이 터집니다. 바로 ‘깨달았다 ’는 환희에 찬 고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3. 사명자로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여기 17절에 ‘주의 행적을 전파하겠다’라는 이 말씀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얽매고 았던 상처의 사슬이 벗어지고 견딜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모든 주의 행사를 전파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분명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5:9-10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염치로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시고 그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갑니다. 빌3: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라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말은 과거를 모두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서 오늘 자신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뛰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으로 마지막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까지 사명을 위해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삽의 상처의 치유와 회복의 현장은 성소입니다. 그건 우리 믿음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어려워도 예배를 포기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일상의 평범한 삶을 잃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경제력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잃기도 하고, 어떤 분은 마음에 여유와 행복을 잃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잃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사라질 때 우리는 조금 더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가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하늘의 생수가 흘 러넘치는 십자가의 은혜로 가득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 앞에 모든 희망을 잃은 아삽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결코 세상의 현실 앞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그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갑니다. 바로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바로 성소만이 그에게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에 세상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 때, 그는 그의 상처와 아픔이 치료가 되고 그의 진정한 복이 하나님 한분임을 알게 됩니다. 아삽은 일어섭니다. 그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더 이상 무력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세상 앞에 도전합니다. ‘주의 행적을 전파하겠다’는 복음의 열정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예배에 동참하신 모든 동성의 모든 성도가 이 은혜 앞에 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