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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1]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빌1:1-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2-05 | 조회: 308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 1:1-6. 2022. 2/6.

 

지금 우리는 올해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전염병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게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더욱이 자고 깨면 오미크론이라는 변종 바이러스가 계속 사람들에게 감염되므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도 극복할 날이 분명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코로나를 이겨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안에 하늘의 기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극복함으로 기뻐하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도 어느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린 아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루 400번 이상 방긋 웃는 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기들을 보면 방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웃는 모습에 매혹되어 우리는 아기들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기쁨 없는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기쁨이 송두리째 다 쓸려가 버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크고 작은 기쁨이 그 속에 담겨 있기에 사는 것입니다.

 

만약 삶에서 기쁨이 고갈되어 버리면 자칫 탈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즉 어떤 악한 방향으로 기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범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은 마약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TV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마약중독자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피우면 어때요?”라는 질문에 말 못할 정도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일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건전한 기쁨을 잘 모르거나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된 곳에서 잠시 느끼는 기쁨마저도 찬양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기쁨의 서신이라 일컬어지는 빌립보 서신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쓴 빌립보서에는 "기쁨의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합니다. '기뻐한다', '기뻐하리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 말이 그저 "너희는 기뻐하라"고 하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권면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기뻐하면서 "너도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려 이 짧은 서신에 16번이나 기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기쁨이라는 헬라어로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 춤을 추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이 본문을 대하기 전 이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8:2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리고 9:1-2절에도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이로 인해 교회는 요즘말로 하면 한 순간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런 잔인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 핍박의 장본인이 자신의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어떻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보아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훗날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3:6-7절에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굿 뉴스입니다. 복음은 인류의 최고 최대의 희소식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차원이 다른, 순간적이지 않고 영구하고 완전한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주어진 모든 저주를 끊어내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힘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든 희비가 결정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는 중요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영원을 결정하는 인간의 최대 주제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대하면 왜 감옥에서도 이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복음, 기쁜소식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기쁨이 넘쳐 빌립보 교회에 보낼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으로 가득 찬 편지입니다. 지금 이 바울이 자신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해 이 말씀을 써 내려갑니다.

 

1. 본문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짧막한 이력서를 보여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라고 씁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도 참 많았고, 이력서를 채울만한 경력도 화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모든 경력과 이력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한 줄 이라고 씁니다. 바울 시대에는 은 아주 경멸스럽고, 말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반란과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당한 청년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수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여 그의 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 뻔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경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은 예수의 종으로 쓰임받고 또 주님이 맡기신 일에 쓰여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바울이 이 기쁨을 빌립보 교회와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까?

 

2. 복음에 함께 참여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3-5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여기 참여한다는 말은 코이노니아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참여한다. 교제한다, 협력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빌립보 서신을 쓸 때가 62년경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을 만난 때가 50년경쯤 되던 해입니다. 그러니까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인데 그 긴 세월 동안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당시 빌립보 교인들은 평안하고 안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1:28-30절의 기록에 의하면 빌립보 교인들은 대적자들로부터 큰 환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소외당하면서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았기 때문에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위해 기도했고, 궁핍한 중에서도 사도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 역시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오랜 지병에다가 나이까지 많고, 더욱이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파트너 쉽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변함없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가 거리두기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익숙해지다 보니 함께보다는 혼자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 성장에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에 있는레드우드’(redwood)라는 삼나무가 있습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에 불과한 것 같은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 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함께 하면 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함께 정신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이 함께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던 이유는

 

3. 반드시 수고의 열매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이 "착한 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본 절의 착한 일이란 주경학자인 헨드릭슨은(Hendriksen)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베풀어주신 구속 사역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바울은 처음부터 빌립보에 가서 전도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제2차 전도 여행의 목적은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들을 통해 세워진 어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려함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그것도 용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가졌던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가 드로아에서 그의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운명의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환상을 본 것입니다. 16: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 마게도냐 사람의 간절한 호소-우리를 도와 달라/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해달라-는 그 절박한 호소, 그 비전을 보고 그는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인생의 방향이 그리고 바울을 만나게 된 유럽인들의 인생의 향방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현장이 마게도니아의 첫성인 빌립보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고 간수와 그리고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착한 일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받은 이들을 통해 세계선교의 물꼬가 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아십니까?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기쁨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의심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확인할 때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장 흥분되고 신나는 일은 복음이 전달될 때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말씀이나, 기가 막힌 입담으로 화려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복음을 전하기만 했는데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복음의 위력을 경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술과 담배로 인이 박혔는데 교회에 나온 첫날 뒤집어져서 새로운 삶을 삽니다. 깨어지기 직전의 부부가 마지막으로 나온 예배에서 복음을 듣고 변화가 일어나 손을 잡고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울증을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던 사람이 단 한 번의 예배에서 복음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탕의 길을 걷던 청소년이 복음 앞에서 뒹굴며 깨어지는 것을 볼 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능력,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망가져도, 아무리 소망이 없는 인생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의 은혜 앞에 바울은 평생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종으로서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은 사도 바울의 가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만난 자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사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고통의 세상에, 문제의 세상에 하늘의 기쁨을 안고 찾아와서 그 기쁨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기쁨을 선물로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힘들다 하더라도, 아무리 우리의 삶에 힘든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이 기쁨을 빼앗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탄은 나의 이 구원의 감격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빌립보 서신에 기뻐하라는 명령형입니다. 기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위축당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 고통의 보자기를 걷어내면 그 안에는 기쁨이라는 선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기쁨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고통만 바라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하늘의 기쁨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기쁨을 보게 하실 것이고, 그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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