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을 빼앗는 것들 빌1:12-21. 2022. 2/20. ③ 최종본
할렐루야!! 오늘 0부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주님 주시는 평안과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웃는 얼굴로 한 번 인사하시죠. -인사 -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 한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갔습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상황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셋째는, 죽음의 문제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 때문에,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두려움에 공포 속에 빠뜨리는 코로나19라는 우리에게 당면한 환경 앞에 세상의 많은사람들이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자고 깨면 죽음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년의 고독사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청년들도 요즘 삶의 탈출구가 안보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픈 현실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에게 처한 환경이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리어 디딤돌로 삼고 세상에 자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어렵고 힘든 자리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1. 상황 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요.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거의 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고통스러운 세월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2절에 절망의 한복판에서 외칩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일 때문에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전”이라는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저들이 자랑하던 전차가 나아가는 길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뚫린 길로 로마의 전차가 행진해 들어가면 그곳이 곧 로마의 영토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곳에 복음을 위한 큰 길이 열리게 되었고,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확보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는 로마의 권력 중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지금 시위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바로 황제의 시위대, 즉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친위부대를 말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부대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발되면 급료도 두 배나 더 받고 남다른 조건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로마의 유력한 가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시위대에 뽑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로마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이었고, 그러기에 아무나 시위대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 정치의 핵심이요, 로마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 즉 황제숭배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철옹성 같은 벽을 쌓고 있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바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매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엡6:20절에서는 분명히 자기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같은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행전 28:20에도 보면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울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그 로마의 정신으로 투철한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중죄수를 가둘 때에는 간수 두 사람이 죄수의 양쪽 팔에 각각 손을 같이 묶고, 그 앞에는 따로 두 명의 간수를 세워서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중죄인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의 시위대 군인들이 배당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보초는 6시간씩 하루에 네 번을 교대로 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바울의 곁에는 하루에 16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 무엇을 하였을 것 같습니까? 바울에게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바로 로마의 중심부에 들어가, 그 로마를 움직이던 사람들, 로마의 정신이요, 로마의 사상을 대표하던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간수들은 바울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처지라 아마도 꼼짝없이 바울이 전하는 바 귀한 복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도 바울이 파렴치범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양심수와 같은 사람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평범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대로 로마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나의 매임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이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이 흔들리지 않는 이 자세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는 바로 이 상황, 이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입니다. 저는 믿기는 우리의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감옥에 갇힌 상황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당신의 때가 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십시오. 시119:37절에,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우리의 눈을 항상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2.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그 아픔을 잘 극복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16-17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본문 16절에 보면 "이들"이라고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나오고 17절에 "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따르고 돕는 사람들이었고, "저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오히려 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무신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임에도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그래서 바울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8절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너희들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내게 괴로움을 더하는 길이라도 그 일을 했지만 나는 도리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내 행복을 빼앗기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겠다. 오히려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지금 바울의 인관관계를 다루는 지혜를 보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숱한 문제가 바로 관계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이로 인해 상처가 생기고 심지어는 씻을 수 없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잘못 만났다가 두고두고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맺었다가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보증 한 번 잘못 섰다가 평생 동안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내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겠다는 겁니다. 옹졸하고 왜소한 내 시선에서가 아니고 예수의 시선을 가지고, 왜곡된 내 심장을 가지고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건을 보고 사람을 보고 미래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만사를 자기가 해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피곤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남의 사역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만 옳다는 고집이 꺾여지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법과 아집 나의 편협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나면 이 사람이 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이 하는 것도 좋아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잘한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과 실수와 허물까지도 은혜가 될 때 진정 교회 일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넓은 가슴을 배워 가십시다. 그는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까지 기뻐했습니다. 나는 죽었고 나는 고생을 했지만 도리어 저들이 일하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3. 죽음도 불사하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절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숨을 쉽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기억나시나요? 왜 오미크론이 약한 변종 바이러스라고 해도 두려워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2020년에 온 세계를 덮은 코로나19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충격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백구의 시신을 검은 봉지에 담아서 시체를 태우거나 깊은 구덩이에 묻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참 우리 인생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기지 않으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끔 장례시장에 가서 시신을 화장 할 때, 저는 그 순간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저럴 줄 알았다면, 왜 다툽니까? 왜 원수를 맺고 그렇게 불평하며 살아갑니까? 지금 바울은 본문에서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20-21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여기 보면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그의 삶에 새로운 가치였습니다. 숱한 문제 앞에도 당당합니다. 우리는 예배 전에 찬송가 549장‘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를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바로벤자민 슈몰크라는 목사입니다. 그는 어느 날 심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집이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고, 자욱한 연기만 내뿜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급해진 그는 집에 남겨놓고 간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을 찾아 보았지만 아이들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두 아들은 이미 잿더미 속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불에 타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접한 그는 두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로 울부짖다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를 시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입니다. 그는 1000여편의 주옥 같은 찬송시를 써내려갑니다.
보세요?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 찬송이 나오나요? 바울도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연약한 존재요 상한 갈대처럼 우리네 인생이 좌절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삶에 그 어떤 희망이나 꿈조차 꿀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임을 알기 때문에,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그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삽니다. 그리고 사명을 깨닫고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사명의 목적이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성공에 있지 않음을 잘 압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왜 세상적인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라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도 남들처럼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욕망도, 자신의 욕심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칭찬이 하나도 없어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귀함을 받으시고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듭니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길을 기쁘게 가게 만듭니다. 이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