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로 오신 예수님 빌2:5-9. 2022. 3/27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퇴원해서 이렇게 3부 예배를 드리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교회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초대교회 시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와 기도, 절제와 금식, 그리고 깊은 묵상으로 경건에 힘써왔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에 힘쓰며 집중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할 때 그 중심에 저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습니다. 참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번에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까 모두가 병실마다 살려는 사람들의 몸짓이 너무 강렬합니다.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지금 바울은 우리에게
1. 예수의 마음을 품자!! (5절)
5절 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무슨 말이에요? 잠언 23장 7절에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은 어떻습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함께 기독교 3대 고전으로 꼽히는 책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토마스 아 캠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가 있을까요?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의 책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고자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분의 마음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6-8절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의 자녀 삼기 위해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를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입니다. 요즘 북한이 ICBM 대륙관 탄도를 쏘아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보세요. 북한의 김정은은 이미 어린나이에 북한 동포에게 자신의 우상화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집권한 뒤 교육시스템을 전면개편한 일이 있습니다. 특히 2014년부터 새로운 교과서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 교과서 내용 가운데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 혁명 활동”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이 안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벌써 3살 되시던 때부터 자동차를 운전하시였으며, 8살도 되시기 전에 대형 화물차들이 많이 다니고 굽인 돌이와 경사지가 많은 300여리 구간의 포장하지 않은 도로를 승용차를 몰고 질주하시여,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신 적도 있었다.” 그리고 3살 때부터 총을 쏘기 시작했고, 3초 내에 1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6살 때는 사나운 말을 길들여 기수보다 더 잘 탔고, 못하는 체육종목이 없고, 10대에는 보통 인간이 이룰 수 없는 학문의 경지에 도달했다 는 내용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김정은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그 위대함은 신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김정은을 지도자로 모신 것을 영광으로 알고,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김정은뿐이 아닙니다. 독재정권의 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우상화 작업을 해왔습니다. 날조와 조작으로 평범한 사람을 신처럼 만드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고, 신에게 도전하자는 선동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나타나서, 인간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현대 첨단과학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3억 5천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6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루 감염자가 5000명을 넘는 기막힌 자리에 있고 사망자도 300여명이 넘는 지금도 감염자수와 사망자수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2년 넘게 팬데믹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현대문명 자체도 멈춰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더더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결코 자기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는 것은 헛된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고 신처럼 되보려는 꿈은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에 대해 6-7절에 말씀을 합니다.
2. 성육신의 의미 6-7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여기 나타나사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을 말합니다. 요 1:14를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도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신학에서는 “성육신”이라 말합니다. 이 성육신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일까요?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죄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정말 어마어마한 것을 포기하시고 자기 희생하신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저는 이번 병실에서 산소통을 24시간 10여일 동안 의지하면서 참 인간 별것 없구나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존재가 뭐가 소중하다고 그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나를 구원의 자녀 삼으셨는가 생각할 때 부끄러움 때문에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모두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사순절입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기에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영적 지식이 부족하면 마귀 좋은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르는 것이 좋다. 교회만 다녀라. 그 정도면 됐어.' 하고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는 문을 전부 걸어 잠궈 버립니다. 이런 잠긴 문 속에 갇힌 성도들이 교회 안에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너무 많이 알아 가지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둔감해 진 사람들입니다. 모태신앙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귀가 아프도록 듣고 또 들었습니다. 성경도 꽤 많이 읽고 배웠습니다. 다 아는 것입니다.
처음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으로 느꼈을 때는 주님 앞에 너무 감격해서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울기도 하고,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열정을 보인 때도 있었고, 생각할 때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너무 고마워 찬송을 부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지금은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이제 각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 아무리 감격적인 이야기라도 자꾸 계속해서 듣고 반복하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용인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새롭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마음이 둔감해져서 요즘에는 은혜가 안 된다는 식의 소리는 변명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저의 가슴 속에 뜨거운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저를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성령이여 좀 더 강하게 좀 더 진하게 좀더 뜨겁게 우리에게 임하셔서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혀서 십자가의 그 놀라운 죽음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안 목사를 주님께서 그런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3. 나와 십자가와의 관계입니다. 8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맞바꾸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나요?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22: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이리 같은 존재, 죄로 범벅이 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이 생명의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 이 엄청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내가 정말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역의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전쟁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오마하 해변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미군 밀러대위는 부하들과 함께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륙임무를 완수합니다. 같은 시각, 전사자 통보업무를 진행하던 미국 행정부는 네 형제가 모두 참전한 라이언 집안에서 세 명의 젊은이가 이미 전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막내도 낙하산으로 그 상륙작전에 침투되었던 것입니다. 비탄에 빠진 라이언 부인을 위해 마샬 장군은 네 번째 아들인 제임스 라이언을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특수명령은 이제 막 상륙한 밀러 대위에게 내려졌습니다. 밀러 대위는 일곱명의 대원을 데리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여덞 명이 한 명을 구하러 가라는 무모한 명령에 대해, 부대원들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이상한 계산이 어디 있어!”라고 투덜댑니다. 그러자, 밀러대위는 대답합니다.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야. 우리가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만큼.” 부대원들은 독일군 지역 깊숙이 들어가 전투를 치룹니다.
찾아가는 도중 동명이인의 다른 라이언을 만나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몇 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부대원들은 과연 1명을 구하기 위해 8명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1명의 목숨이 8명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가?” 드디어 라멜지역에서 문제의 라이언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라이언 일병을 찾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마지막 전투에서 라이언 일병만이 살고 밀러대위와 소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히 받으라는 말이지요.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 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노인이 된 라이언일병은 가족들과 함께 격전지를 다시 찾습니다. 밀러대위와 소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노라고 울먹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전쟁 끝에 살아남은 당신은 과연 그 희생의 대가로 「살아 남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바쳐진 전우들의 거룩한 희생을 과연 그대는 감사하게 받으며 살아왔는가? 지금이라도 그들의 희생을 감사함으로 받으라!!”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