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나를 버리리라 마26:31-35. 2022/ 4/3
요즘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사건이 있습니다. 스토커 문제인데 매우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를 5개월 넘게 스토킹하다가 어머니가 있는 집안에 들어가 전 여친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딸을 잃은 가정은 평생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며 살겠습니까? 스토킹이란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 따라다니며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스토커들이 고발을 당해서 경찰에 연행되면 흔히 이렇게 항변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게 죄가 됩니까?” 스토킹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기 감정만 중요하지, 자기의 스토킹으로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은 알 바가 아닙니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엄청난 예수님 자신의 희생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섬김이 있습니다. 요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 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필립 얀시라는 세계적인 작가가 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 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이 은혜 앞에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한 생을 십자가의 사랑에 매여 살았습니다. 이 사랑을 강권하시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 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붙드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은 주님이 자기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행복한 고민이 아닙니까? 바울이 왜 행복했습니까? 사랑하는 그분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우리 역시 그 사랑을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사셨는지 모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홀로 광야로 가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홀로 지내셨습니다. 벳새다 빈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그들을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가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은 더욱 혼자일 때가 많으셨습니다.
Ⅰ.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31절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다 나를 버리리라’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3년 동안이나 그렇게 사랑해 주고, 배신한다는 놈도 끝까지 사랑해 주었는데, 마지막 만찬에서는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도 나누어주었는데, 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데, 그런데 이들은 자기 목숨 살겠다고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거야.’ 이런 생각하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감정이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마26:39절에 보시면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여러분,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로 함께에 대한 열망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의 거리를 가진 분은 없습니까? 함께 걷고 있지만 따로 걷는 것과 같은 이질감,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었지만 그 사랑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배신감, 어쩌면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내 마음이 매우 고민되어 죽게 되었다.’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고민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겪어내야 하느냐, 아니면 십자가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느냐?’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습니다. 그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지, 죽을 것만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인데, 죽을 것만 같은 깊은 고민과 갈등으로 인해 지쳐 계신 예수님인데, 제자들은 모두 그런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더구나 더 힘들었던 것은 베드로의 배신입니다.
Ⅱ. 베드로마져도 33-34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여기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여기서 ‘나는’이란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원어로 ‘에고’(ejgw;)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ego’가 나왔죠. 이 말은 자기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할데 쓰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자신만만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고백만으로 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군대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칼을 뽑아 휘두르며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 홀로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그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타난 군대의 수효가 얼마이든지 간에, 주님께서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잠재우시던 그 능력으로,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이 넘는 대군중을 먹이시던 그 권능으로, 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주님 앞에서 그 주님을 위해 단신으로 군대와 맞선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처럼 철썩같이 믿었던 주님께서 군대를 쓸어버리시기는커녕 저항한번 없이 잡히시는 게 아닙니까? 그저 무기력하게 결박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개 끌려가듯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베드로가 상상하던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머리 속에 그리던 메시야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망하고 바라던 사건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신념이 찍히우고 꿈이 꺾어지며 계획이 부서지고 희망이 떨어지며 야망이 빼앗기우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결국 그도 십자가 앞에 맥없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 아침,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은 30냥에 파는 가룟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제자 중에 가장 지혜가 있고, 판단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3년을 함께한 이 유다를 향한 주님의 일성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포함한 마26:24절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을 때, 함께 신앙 생활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아라. 알이 차지 못한 겁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조금도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구원과 은혜의 관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회개를 통과하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va)인데, ‘돌다’ ‘방향을 바꾸다’(turn)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무너졌지만, 그의 삶은 그후로 철저하게 주님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죽는 자리에 서서 온 땅에 복음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유다를 보세요. 그의 삶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가 없습니다. 마27:3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 ” 예수님이 애매하게 불법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게 가룟 유다의 한계입니다. 그는 단순히 후회했을 뿐입니다. 대제사장에서 가서 무르려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은 30을 성전의 헌금함에 던져버리고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마27:5절에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는 비참하게 배창자가 터져 죽습니다.(행1:18~19 참조) 여러분, 정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죄를 지어서 멸망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멸망해야죠. 엄밀하게 말하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해서 멸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면 별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Ⅲ.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고후 13:5절
고후 13:5절에 바울은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말씀을 합니다. 너희 안에 구원의 점검을 하라는 것입니다. 확증은 ‘발견하라 찾아봐라’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롯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경직목사님은 지금처럼 어두운 시대에 더욱 더 그리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한번은 한경직 목사님이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그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나온 한경직 목사님의 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이 나왔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 가운데에 이 상을 받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나 한경직입니다. 이 상을 받아야 될 사람은 한국교회 성도님들입니다. 공산당이 싫어서 목숨을 걸고 내려왔던 우리교인들, 시간과 자기 재물을 아까와하지 않고 바치면서 한국교회를 일으킨 사람들, 그들에게 이 상을 돌립니다. 저는 이 상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사참배 앞에서 당당히 목숨을 던질 때에 감옥에 뚜벅뚜벅 걸어갈 때에 나는 부끄럽게 몰래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서 자기 가슴을 치며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 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눈곱만큼도 구원을 얻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분이 서울 영락교회를 은퇴하시고 남한산성 아래의 작은 집에 머물고 계실 때 영락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이 매년 연초가 되면 한경직목사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한경직목사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목사님들이 한경직목사님께 이렇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들에게 해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한경직목사님께서 그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십시오.”‘예수 잘 믿으십시오.’ 여러분, 이 말은 잘 새겨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선 목사님들입니다. 교인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입니다. 그 목사님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예수 잘 믿으십시오.’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일진대 어찌 회개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주님의 이 아픔의 메시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게 겸손입니다. 겉으로만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게 겸손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세상의 온갖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담대함을 갖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령 앞에 기도하십시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왜 배신 때리는 인간들 미워하지 않으셨는지, 그리고 그 십자가의 갈이 왜 침묵이셨는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발견하고 동성교회가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