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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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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1] 제 1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4-09 | 조회: 202

1언 아버지여 저들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3-38.

 

선교사들이 선교훈련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서약에 앞서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 가장 고심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에 무슨 말을 써야될 것인지를 망설입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귀하게 생각되는 것을 제일 먼저 쓰려고 생각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고 합니다. 가령 "내가 사용하던 물건을 놔두고 가는데 이 세상 떠나면 이것은 누가 가져라."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국에 선교단체인 WEC에 가보면 가족들이 모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짐을 줄 사람이 없어서 50, 7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교부 창고에 주인 없는 짐만 덩그러니 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는 가슴이 매입니다. "우리 부부가 만약 죽는다면 이 아이는 큰 집에 맡겨라. 내 작은 누이에게 맡겨라" 할 때 반드시 그 양육자들과 협의한 다음에 유언장에다 기재합니다. 어쨌거나 선교사가 제일 첫 문장을 무엇으로 써야될 것인가를 깊이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현장으로 가봅니다. 주님의 일곱 마디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그 첫마디 유언장을 우리가 개봉합니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동안 무려 6시간이나 고통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데이거나 예리한 것으로 손끝만 찔려도 아픈데, 큰 대못으로 손목과 발목이 박힙니다. 그것도 오징어 말리듯이 몸을 쫙 펴서 힘을 균등하게 줄 수 있게 못을 친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못을 쳐서 손에다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을 때까지 계속 비틀거리다가 마지막 고통 가운데 절명하는 순간까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일곱 마디의 유언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한 주간 십자가에서 남기신 주님의 기도를 붙잡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왜 이 말씀이 필요한지 성령의 도움을 통해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 와중에 주께서 첫 번째 유 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 죄 용서의 기도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시옵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 사해달라는 것은 용서를 말합니다. 이 용서의 기도는 원문에 살펴보면 한번만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계속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계속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웃들에게 오해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분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고난의 한 복판에서 주님은 가장 먼저 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 이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 무지 때문입니다. 34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무지를 말합니다. '무지'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다의미입니다. 본문 34절 마지막에 보면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합니다. 19:23절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눠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처형을 행하고도, 그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 이의 마음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형수의 몸에서 벗겨진 옷을 네 깃으로 나눠 가졌습니다. 당시에는 사형수들이 착용했던 것들을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취해가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이의 고통도, 또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며 절규하는 이들의 아픔도 외면한 채 자기들의 분깃에만 눈이 멀어 누가 더 좋은 것을 가져갈지에만 혈안되어 있는 것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35절은 백성들이 서서 십자가와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자신들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의 자세로 구경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차경기를 관람하듯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그들은 불과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복음19:38)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며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메시야로 기대하며 영접했습니다. 그것이 불과 닷새 전입니다. 그들은 닷새 만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빌라도 총독이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굴 놓아주길 원하느냐?’고 물을 때 바라바를 놓아주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은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가 되어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들은 몇 시간 후에 자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철저하게 느끼고 말았습니다. 23: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모습을 보면서, 로마 백부장의 외침처럼 죄없으신 의인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자기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슴을 치며 골고다를 떠나야 했습니다. 자신들은 십자가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것처럼 방관자(구경꾼)로 골고다에 서서 십자가 처형을 구경했지만, 결국 그 모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용서에 그렇게 인색한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임금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그 돈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노동자가 20년 동안 꼬박 벌어서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 한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그는 한 달란트의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20 만년 동안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돈을 빚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로 죽어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이 꼭 그와 같습니다. 죽어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그 어마어마한 빚을 하나님 당신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빚진 마음을 가졌다면 주님께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고 용서의 품안에 나를 끌어 안으셔서 새로운 인생으로 살도록 하신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나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제1유언을 가볍게 흘러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아서 사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분이 어떻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아들로 삼을 수 있었을까요? 이분이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 삼으려 할 때 가족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특히 딸이 그렇게 반대했습니다. 이분이 딸을 설득하며 한 말이 전해집니다.

 

아버지는 성경말씀 중에 우상숭배하지 말란 십계명 하나 지키려고, 일본 사람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으며 5년 동안 그 차가운 감방에서 꿋꿋이 견뎠다는 걸 너두 알고 있겠지? 성경말씀에는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란 말씀이 있다. 네 오빠를 죽인 그자는 원수다. 하지만 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도 지켜야 할 게 아니니?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안 지키면? 그건 말이 안 되잖니? 원수를 일곱 번, 아니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시며, 사랑으로 회개시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자가 제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가겠지? 지옥 가는 걸 알면서 목사가 구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니? 지옥 가는 건 막아 줘야지.” 그렇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고, 때로는 도저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 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마6: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실 때 그 용서는 도대체 어떤 용서일까요? 예수님은 마 5:23-24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배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을 때 화해부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화해한 다음에 드리는 예배가 열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용서 개념은 누군가와 틀어진 관계를 바로 잡아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로 가장 흔히 번역되는 법률적인 용어로서 빚진 사람을 빚진 상태로부터 풀어주어서 형벌을 면해준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빚을 내준 채권자(債權者)와 빚을 진 채무자(債務者)가 서로 화해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용서는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나 아픔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내숭을 떨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보복하는 길을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7:59-60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람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용서의 한 모범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화해하시겠다는 사랑의 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58절 보면,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8:1에서 보는 대로 살기등등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행전 9장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보고 뒤집어집니다. 도무지 변화된 인생으로 주님을 따를 것 같지 않던 바울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됩니까? 바울도 마지막 로마에서 참수를 당하는 순교의 자리에서 마지막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변화의 이면에는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고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스데반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기도 덕분에 사도 바울을 얻었다!” 참 의미 있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는 더 나아가 복음이 넓게 넓게 확산되어 감을 볼 수 있습니다. 8:1() 보면, 큰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흩어집니다. 8:4 보면, 그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11장에 보면, 안디옥까지 복음이 들어가 교회가 생기고,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후 바울의 선교팀을 통해 소아시아, 유럽, 로마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결론을 내면서 이런 질문이 일어납니다. 나는 용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용서치 않는 마음의 상처는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게 마련입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큰 사건이 아니라도 사소한 다툼 속에 서운한 감정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가슴에 쓰디쓴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렇게 응어리진 마음은 우리로 삶을 비관하게 하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무려 27년이 넘는 기나긴 죄수의 생활을 할 때 늘 다짐한 게 바로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원한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한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한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누군가를 향한 용서치 못한 미움과 원한은 결국 나를 파괴하기 일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기는 쉽지 않고 우리에겐 불편하고 어렵게 다가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서 우리 속에 진정한 십자가의 용서의 복음이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보세요.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용서를 빌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그래도 쉽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상대방이 씻을 수 없는 나에게 상처와 아픔과 피해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은 한 발 더 앞서가서 상대방이 용서를 빌지 않아도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내가 먼저 상대방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외치신 첫 번째 절규는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줍니다. 용서 없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를 미워하셨습니까? 용서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보복을 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우셨습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 분 마음속에 참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상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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