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부활의 선물 (요 20:19-2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4-23 | 조회: 274

부활의 선물 (요 20:19-23)

 

요즘 같은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현실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두려움의 장애를 가지고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고 다루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내일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죽하면 역사가 코로나이전코로나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겠습니다. 이것 은 단순히 인명피해나 경제적 피해와 같은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첫째, 교세감소입니다. 둘째, 충성도감소입니다. 교인들이 3년이나 예배가 축소되고 제한되면서 예배참석에 대한 열심이 식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주일예배를 비롯한 각종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던 분들이 주일예배만 드린다든지, 주일예배를 잘 드리던 분이 온라인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대부분의 사역이 중단되면서,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봉사에 앞장서던 분들의 열심이 식고 있습니다. 교회사역에 대한 관심이 줄고, 하던 봉사도 중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재정 악화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이 줄었습니다. 네번째, 전도환경의 악화입니다. 코로나사태로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블신이 깊어질대로 깊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무슨 전도냐 하는 생각으로 교회 스스로도 전도를 중단하면서 , 전도동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요즘 20, 30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데가 점집이라고 합니다. 점을 치는 운세 문화는 사회가 불안할수록 점점 번창하고 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애들이 불안하니까 점집에 가서 뭔가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과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여기 제자들이 문들을 닫아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문을 닫았다고 표현하지 않고 문들을 닫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극도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 문만 잠근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의 문마져 다 잠긴 현장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너무 혼란스러운 장면입니다. 일단의 여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지만, 한번 좌절과 두려움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다시 사신 부활의 모습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니 얼마나 제자들 놀랬겠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은 마음이 얼어붙고 눈이 얼어붙고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으니 주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주님처럼 생겼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4:37절에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랬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 귀신 아닌가? 질겁했다" 그 얘기입니다. 두려움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말씀합니다. 19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19절하반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21절 상반절에도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6절에도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8일 후에도 문들이 걸어 잠긴 방안에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두려움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평강을 외치시는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기억나시나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이 당부를 합니다. 제자들이 고난 앞에 결코 두려워 말 것을 이야기하며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여기 나의 평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목하세요. 그는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를 향하여 돌을 드는 사람들과 상대해서 그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한 때는 임금을 삼으려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다 버리고 도망가는 삭막한 분위기에서 한평생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속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평안이 가능했을까요? 우리도 이 평안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이 생수의 평안을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평생 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고후 7:5절에 보면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사도 바울은 정말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의 마음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빌4:6-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에 그는 로마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23중으로 철문이 굳게 닫겨져 있었습니다. 지하에 있던 감옥은 암흑천지였습니다. 먹을 것이 제대로 제공될 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지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울은 평강을 간직한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철문이 겹겹으로 잠겨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암흑천지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찾아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평강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사명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은 세상은 그들에겐 감당치 못할 엄청난 현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두려워 떨고 있는 실패자들을 보낸다는 이 말은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갖추어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명령을 들은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습니까? 더무엇보다 그들은 배신자들입니다. 마땅히 주님에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오히려 신분 노출이 될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니 어느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비현실적입니까?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명령이 현실성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귀와 사탄과 악령을 일컬어 '세상의 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4절에서 사탄을 일컬어 '이 세상 신', '이 세상 왕'이라고 말합니다. 고후서 4: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려 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이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3. 성령받으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여기 숨을 내쉬며’ - 여기에서 숨을 내쉰다는 동사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2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흙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숨을 내쉬며의 이 동사는 구약 에스겔 37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되고 있습니다. 37:9-10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여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마른 뼈, 해골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숨결이 그 마른 뼈에 들어가매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 능력 앞에 선 부활 신앙을 가진 자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3절입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사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조차 없습니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의 죄를 사한다고 그 죄가 용서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본문 23절의 말씀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우리에 있음을 말씀함이 아니라,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이 주님 앞에서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도록 역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섬기며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복음의 당당함 바로 성령의 충만한 모습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자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사도행전을 열기만 하면 금방 나옵니다. 세상이 짓눌러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쓰여졌습니다.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고,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했으며,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교회에 충만해야 하고, 내 안에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충만할 때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가로되", 스데반을 놓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모두가 충만하다는 대명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령 충만의 역사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이 충만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까? 부활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왜 평안을 주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바로 당신의 영원하신 숨결, 성령의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를 군대 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사랑과 생명의 숨결을 말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다가오셔서 부활 신앙으로 이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