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인 5월을 맞이해서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쳐 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한 가정의 건강함과 행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과정에서 부모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가정의 달의 첫 번째 주일인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과연 우리 믿음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해 줄 것이며,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부모님께로부터 무엇을 상속받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가정을 바르게 가꾸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보석과 같은 선물로 맡겨주신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자녀교육이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가장 귀한 사명인줄 알면서도 우리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떻하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축복받는 자녀로 키울 수가 있을까? 이것이 아마 부모의 고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믿음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자녀교육과 양육의 방법이 참으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또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한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도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디모데의 모습 속에서 그 가정의 어머니의 자녀교육과 양육의 모습이 우리에게 한 롤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1. 영향력있는 부모가 되라 3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명의 어머니인데, 로이스와 유니게입니다. 로이스는 디모데의 외할머니이고, 유니게는 디모데의 어머니입니다. 행전 16:1절에 보면 디모데의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무슨 말입니까?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인이지만, 헬라인과 결혼했습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청년 디모데를 만났을 때, 헬라인인 그의 아버지는 죽은 이후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유대인인 어머니와 이방인인 헬라인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는 사람들에게 결코 칭찬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주변의 유대인들로부터 ‘저 놈은 헬라인 자식이야. 우리 유대인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아이야. 유대인의 수치야.’ 그런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2절은 디모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청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도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은 어떤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유니게가 디모데를 어떻게 양육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신앙생활하라고 권면하고 가르쳤는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 유니게는 아들 디모데의 신앙에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딤후 3:15를 보면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이었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신앙의 양육을 받았습니다.
2. 격려하며 키워라. 6-7
6-7절에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강조를 합니다. 여기 ‘불일듯하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를 직역하면 ‘불타오르게 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나’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다시 불타오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꺼져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때는 뜨거웠던 그였지만 이제는 식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꺼져있고 식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사역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둘째는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고 복음으로 인해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셋째는 그래서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고난을 감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의 삶에 사도바울은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를 원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가 있습니다. 인생은 결코 한 번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인생에 다시가 없다면 성경은 반 이상으로 줄어야 합니다. 반은 커녕 몇 페이지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에 다시가 있음을 성경인물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약 모세에게 ‘다시’ 가 없었다면 모세는 모세일 수 없습니다. 모세는 실패한 후 미디안 광야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그 호렙산 떨기나무 사이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에 다시 그 인생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그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다시 타오르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게네사렛 호수에서 다시금 재소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격려자의 삶이 필요합니다.
요즘 우리 자녀들은 부모 세대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너무나도 다른 고민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경쟁사회’를 뛰어넘어 ‘위험사회’ ‘피로사회’라고 말하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경쟁사회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대신해 뛰어줄 수 없습니다. 글로벌 위험사회 속에서 우리가 늘 우리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없습니다.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착취를 가하는 피로사회 속에서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피로감을 무엇으로 덜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은 온갖 유혹의 손길을 내밀어 그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려 합니다.
자주 넘어지고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점점 힘들어하는 이 시대에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잠24: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심지어 실패의 자리에 있을찌라도 다시 다시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십니다.
3. 영향력을 끼치는 자녀로 키우라 8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의 증인이 된 것이나, 자신이 주님을 위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하십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를 인도해 주기도 합니다. 고후12: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아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결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져서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체험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자연을 보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은 해발이 무려 8848미터나 됩니다. 그 꼭대기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곳에 등정을 해도 잠시 머물고 빨리 내려와야 합니다.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생존할 수 있는 한계를 ‘수목한계선’이라고 하는데, 그 높이는 불과 해발 3000미터 밖에는 안 됩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려면 낮은 곳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높아지면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낮아져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너는 나의 연약함을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생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택했던 디모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바울 못지않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땅에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 성당이 있습니다. 그 바울성당 한 가운데 사도 바울의 시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시체 바로 밑에 디모데의 시체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디모데는 끝까지 바울을 위해 살았고 죽어서도 바울 밑에 묻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이 물려준 그것에서 사람들은 여러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했던 디모데는 결코 이기적인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자신의 환경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할만큼 힘듬도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 그를 격려하는 사람들로 다시 주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디모데 한사람으로 주변이 복음의 향기가 진동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처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