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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스승과 제자(왕하 2:6-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5-15 | 조회: 364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며 특히 교회에 수고하시는 교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평생 살다가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10명의 진정한 친구, 100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다.”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존경하는 스승이 있습니까? 일생의 영원한 멘토가 될 스승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가 열린 사람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삶의 모범이 생깁니다. 생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넘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좋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뒤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허준 뒤에는 유의태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여호수아 뒤에는 모세가 있었습니다. 다윗 뒤에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엘리사 뒤에는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그의 마지막 사역에 자기를 따르는 제자 엘리야와 함께 요단강에 머물러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에서 요단강은 참 의미 있는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얍복강은 요단강의 지류입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일곱 번 들어가 씻고 몸의 한센병이 깨끗하게 나은 곳도 요단강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곳도 요단강입니다. 그 강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섰습니다. 요단강가에 섰던 두 사람, 사제지간의 모습을 통하여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 스승을 놓치지 않습니다.

 

왕하 2장을 보면 엘리야는 자기가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준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선지학교들을 돌아보고 선지생도들을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 분주하게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한사코 엘리사를 두고 혼자 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했습니다. 길갈에서(2), 벧엘에서(4), 그리고 여리고에서(6)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역시 길갈에서(2), 벧엘에서(4), 그리고 여리고에서(6) 반복해서 맹세했습니다.

 

도대체 엘리야는 왜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했을까요? 그리고 엘리사는 또 왜 한사코 엘리야를 따라가려 했을까요? 아마도 엘리야는 엘리사를 테스트해 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끈질긴가를 시험해 보려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는 세 번이나 반복되는 스승의 명령을 세 번이나 똑 같은 답으로 끈질기게 따랐습니다.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좋은 스승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온갖 궂은 일을 맡아서 하며, 구박을 참고, 인고의 세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끈기가 엘리야를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그렇다면 왜 스승인 엘리야가 여기 머물라는 이야기 앞에 계속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거룩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이 말씀 속에 엘리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선지자 직을 맡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 직을 수행하더라도 그 갑절을 수행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엘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예전 성경엔 갑절의 영감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왜 갑절의 영감을 구했을까요? 이는 스승보다 나아지겠다는 인간적인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인간 됨됨이가 스승 엘리야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갑절의 영감 - 그것은 이 시대의 요청아니겠습니까? 스승의 시대보다 엘리사의 시대는 한층 더 패역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시대가 지도자들의 사악함에 있었다면, 엘리사의 시대 그 사악함에 온 백성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가 정치적 타락에 머물러 있었다면 엘리사 시대 그 타락이 종교 전반에까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에 엘리야는 선지학교를 세워 제자를 훈련을 했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50여명의 제자를 그 영적 암흑기에 세웠습니다. 그들을 통해 다음 세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대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승 앞에 선 엘리사의 이 간절한 기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고 살아갈 때, 어떤 소원이 있나요? 지금 코로나19의 후유증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코로나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명피해나 경제적 피해와 같은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첫째, 교세감소입니다. 코로나사태로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코로나가 장기간 되다보니 특히 교인들 가운데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이후 신앙은 유지하면서도 교회는 출석하지 않는 교인이라는 뜻으로 코로나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둘째, 충성도 감소입니다.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주일예배를 비롯한 각종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던 분들이 예배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져 갑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대부분의 사역이 중단되면서,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봉사에 앞장서던 분들의 열심이 식고 있습니다. 교회사역에 대한 관심이 줄고, 하던 봉사도 중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재정 악화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이 줄었습니다. 넷째, 다음세대 문제입니다. 코로나사태 이후 많은 교회의 교회학교와 청년부가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코로나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부분이 다음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심히 염려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사태로 교회는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다시 회복을 하기로 원하는 마음이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것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렇게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있습니다. 소망을 이루고 픈 간절한 마음을 우리는 열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마음속에 간절한 열망은 무엇입니까? 취업을 앞둔 청년이나, 취업을 앞두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마음에는 취업이 가장 큰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해야 할 청년들에게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열망일 수 있습니다.

 

삶이 너무너무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이 힘든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남들처럼 행복한 웃음으로 웃는 그날이 속히 오는 것이 가장 강렬한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불화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은 빨리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되는 열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은 사업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분들은 건강의 회복이, 친구나 이웃과 관계가 불편한 사람은 좋은 관계로의 회복이 그들의 마음속에 큰 열망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갖는 그런 열망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신앙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전혀 신앙적이지 않는 것들만 끌어안고 살거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만을 열망하며 산다면 우리 스스로 어찌 신앙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이라면 뭔가 신앙인다운 열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2:1절에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사슴이 광야에서 물을 찾고 있는 상황은 팔레스타인에서는 굉장히 위급한 상황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물을 찾지 못해서 기절한 사슴은 곧 죽음이 임박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사슴의 눈에는 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 자기 영혼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느긋함이 없습니다. 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네팔을 갔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젤리꽃 근처에서 순례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체투지를 하며 그야말로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는 것입니다. 이미 몇 개월 그렇게 길바닥을 기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그렇게 길바닥을 기어야 할 지 모릅니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이고 옷을 낡을 대로 낡았고 얼굴을 햇볕에 까맣게 탔습니다. 저들은 승려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순례를 마친다고 누가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 순례 도중에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저들의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 나름의 거룩한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저들을 보며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내 안에 거룩한 욕망이 있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 엘리사가 그렇게 갈망하는 갑절의 영감이 무엇입니까?

 

3.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건너온 엘리야는 자기를 끝까지 따라오는 제자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이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볼 때에 그런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순간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여기 갑절의 영감을 구할 때, 10절을 보면 엘리야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보세요. 엘리야는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비를 멈추기도 하고 36개월 동안 마른 땅에 비를 내리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하늘에서 불을 끌어당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제자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은혜를 입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자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14: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다음세대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만왕의 이되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이거 엄청나잖습니까?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이 영광스러운 일을 제자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친 것처럼 너희들도 가르치고 내가 전파하고 치료한 것처럼 너희들도 전파하고 치료하여 죽음과 죄 가운데 신음하는 뭇 심령들을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이 영광스러운 일을 너희가 하게 될 것이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님 당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 앞에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스승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16절에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여기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이 다른 보혜사는 성령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너희에게 주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주사'라는 표현은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보혜사 성령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성령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되었고, 뿐만아니라 이 땅에 사명자로 살게 하십니다. 성령은 당시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인 연약한 인생들에게 꿈을 주시고 당신의 영광스런 교회를 세워 온 땅에 하나님 나라를 힘있게 펼쳐 나가십니다. 우리 교회가 주께서 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을 붙잡고 나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속의 물든 우리의 자녀들을 영적인 감화를 통해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 얼마나 어렵습니까? 학교와 가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게 주일날 한 두 시간이 과연 저들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답답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귀한 직분임을 알면서도 그만 포기 하려는 선생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사실입니다. 이 처럼 교사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자는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스승의 주일에 무엇보다 교회학교에서 땀 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우리의 교사!! 그들은 해산의 수고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이 헌신은 진정한 회복과 변화가 반드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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