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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그대 무얼 향해 달리고 있는가? (빌3:12-14, 청년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5-22 | 조회: 27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청년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청년들을 온 성도들이 축복하고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을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갑갑하게 막힌 절망스러운 현실을 밝게 열어갈 가능성 즉 시간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청년이라면 열정과 더불어 열정을 표현할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도 그 열정을 풀 시간이 없으면 미래를 열 수 없고, 또 시간이 있어도 하나님 주신 꿈으로 인한 열정이 없다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령으로 봤을 때는 청년인데 그 속에 든 것은 세상의 썩어지고 병든 것이 가득 하여, 자신의 야망과 꿈 이룰 생각만 하는 청년답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청년기를 살며 희망 없이 사는 젊은이를 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나이는 많지만 하나님 주신 꿈을 간직하고 공동체와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열정적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청년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청년들이나 신앙의 젊음을 갖고 사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멋지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말씀을 마라톤에 비유하여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나는 지금도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지금 수감되어 있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언제 풀려 나올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지금 60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몸에는 여전히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다. 남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늘 어떤 통증을 달고 살고, 불편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가듯이 인생을 살겠다,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가볍게 들으면 안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포기하고 그저 앉아있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달리리라.' 바울이 무엇 때문에 주저 앉지 않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까?

 

1. “소명 때문입니다. 12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로 무엇을 향하여 그렇게 달려간다는 것입니까? 14절에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고 했고 12절 말씀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간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 경기를 할 때도 그냥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골대를 향해서 찹니다. 분명한 목적 골문을 향하여 골을 차는 것이 축구입니다. 아무렇게나 공을 찬다고 하면 백전백패입니다. 하기야 자살골도 있습니다. 자살골을 넣은 선수는 평생의 불명예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도 자살골을 넣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하는 곳에다 골을 차는 자살골을 넣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 가운데 그것을은 바로 소명이라는 말입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는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일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냈습니다. 자기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 자체가 소명입니다. 무엇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한 그 구원안에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바울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율법의 의에 매여 살았던 자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구원을 받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오직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순교의 현장에 증인으로 서있던 자입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자신의 삶의 초점을 맞추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5:10절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그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고 구원 이후의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수고하는 소명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면

 

2. 과거로부터 자유함을 가지게 됩니다. 13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만약 바울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혔다면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 삶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서느냐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으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과거, 실패한 과거를 잊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족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실패자라고 자책하고 포기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쓰러질지라도 다시 용기를 내어 뛰어야합니다.

 

인생살이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사람 없고, 단 한 차례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입니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뛰어가는 한, 우리는 여전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과정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실패자가 아닙니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순간을 겪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살 소망까지 잃어버린 채 폐인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발판삼아 더욱 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9:62절에 보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뒤에 있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잘못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실수했던 것, 부끄러운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어두운 과거를 이 시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달려가는 이유는

 

3.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4

 

본문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노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세속에 물결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거기에 무슨 능력이 있고 열매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청년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청년들은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무슨 말입니까? 열심을 품고는 성령과 함께 불타라는 것입니다. 새벽에도 기도의 자리에 서고 늦은 밤에도 청년들이 예배당에 모여 찬양하며 은혜 앞에 서는 교회가 얼마나 근사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마라톤처럼 달려가는 인생 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진로 문제 결혼 문제, 신앙을 지키기 힘든 것들이 나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수저이론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절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나는 흙수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 인생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흙수저라고 해서 인생에 다 낙오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은 남에게 뒤떨어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고, 출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서 남들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쉽게, 더 빠르게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안달을 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일확천금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주식에 투자해서 남들보다 더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요즘에는 한국산 가상 화폐인 테라와 루나 가격이 폭락을 했습니다. 여기에 젊은이들이 빚을 내고 영끌을 했는데 한 순간에 수십조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일확천금을 얻고 싶어하는 이들이 받은 충격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휩쓸려 청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청년은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흔들어도 그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오스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당시의 시대에는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면, 오늘은 유혹과 미혹을 통해서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박해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미혹으로 우 리의 신앙을 변절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애물을 너머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까? 청년 요셉에게는 성적 유혹이라는 그의 인생의 최대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세상의 권력에 메여사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장애물이 있나요? 혹시 이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주저 앉은 분은 없습니까? 얼마 전에 아무도 가지 않은 바다 한 가운데 한반도 크기의 7배에 달하는 엄청난 섬이 생겼습니다. 인공위성에서 사진을 찍어 급히 확인해 본 결과 그것은 쓰레기가 저절로 모여서 만들어진 섬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다의 조류에 저항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다 한곳에 모여 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조류가 만나는 곳은 때로 난파선의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법칙에도 해당됩니다. 조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시대의 조류에 흽쓸리고, 세상의 힘에 굴복해 떠다니다 보면, 저절로 쓰레기 섬, 난파선들의 무덤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조류에 저항 없이 쓸려 다니는 자의 종말은 세상조차 외면하는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런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당히 시류를 이용하거나 피하는 것으로는 교활한 세상에 백전백패 할 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움켜쥐는 비결은 용사처럼 시류를 돌파하고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맡긴 하나님의 사명을 당당하게 성령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롬 12:2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저항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세상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다며 추구하는 세속주의 세상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결이 거대한 해일처럼 모든 사상, 가치관, 사람들의 생각을 뒤덮어버리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올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내 단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쏟을만한 목표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대 무얼 향해 달리고 있는가?’ !! 다시 말씀해 보세요. ‘그대 무얼 향해 달리고 있는가?’

 

이제 주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교회에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주님께서 나 하나를 위해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한번뿐인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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