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한복판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웬만큼 성공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가게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값비싼 물건들이 모두 타 버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안됐다. 이 집 주인은 정말 열심히 노력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다음날 아침, 가게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었습니다. “이 상점의 모든 것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주인 백." 거리를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주인의 용기와 끈기와 당당함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이 정도의 기백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십시일반으로 그 주인을 도왔습니다. 돈도 꾸어주고 물건도 외상으로 대 주고 해서 얼마 되지 않아 그 주인은 금방 다시 일어섰습니다.
남들이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바닥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실로 위대한 일입니다.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서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거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로 위대한 사람일 것입니다. 꺾일 듯 꺾일 듯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 같으면 절망하고 포기했을 그런 환경 속에서 꿋꿋이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다 어렵습니다.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은 희망의 길을 찾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어두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두움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능성을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해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불가능할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는 4주 동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가정 형성의 주체는 남편도, 아내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가정을 직접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설계도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로 하여금 건축가로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는 행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치 집을 짓는 건축가의 모습으로 가정을 세우는 일에 아내의 역활 또 남편의 역할에 대해, 부모의 역활에 대하여 더 나아가 자녀가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건강한 가정의 건축가는 부부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먼저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단어가 나오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건축에 있어서 부부는 사랑과 복종이라는 두 기둥으로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먼저 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이 복종하라는 말씀은 원래는 군사용어였다고 합니다. 상관의 통치권 아래 있는 하급 군사들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때 쓰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군사들은 그 명령이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그 의미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 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워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합니까? 교회라는 말을 조금 좁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고, 그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도 그 구원의 감격이 없으면 내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불평하기 쉽습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기쁨과 감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도 기쁨과 감격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과 감격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평도 나오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명령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불평스러워도, 짜증이 나더라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그렇게 않습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관계가 맺어졌고, 강요가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 /span>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으로 인정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남편을 존중합니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 사랑은 아카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내 요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자신을 부정하고 보상을 원하지 않는 철저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 줄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배신하고 등을 돌려 떠날지라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마음 아픈 사랑입니다. 때로는 당신의 백성이 사랑을 거부할지라도 사랑하신 짝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은 교회나 당신의 백성들이 실수하거나 모자람이 있어도 책망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실수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인정하고 격려하며 다시금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바람을 채워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때로는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망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사랑으로 세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어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여놓았습니다. 공동번역과 표준 새 번역성경에서는����아내에게 모질게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어려운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남이 만나 함께 사는 부부는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언약 관계입니다. 이 기둥이 잘 견딜수 있도록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보세요. 이 기둥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그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언약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처럼 자연스레 되지 않습니다. 쌍방 간에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2. 건강한 가정의 건축은 부모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 부모의 역할은 뭐, 몇 달을 두고도 다 못할 정도로 할 말이 많습니다. 21절에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격노한다'는 말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바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격노케 하는 것은 더 이상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힘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를 꺾어버리고 용기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소유권자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양육자요 보호자요 지지자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맡겨주신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를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자식은 결코 우리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집안의 분재처럼 키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재능과 성품에 맞게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도 가정이 행복의 자리가 됩니다. 분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분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은 나무를 멋진 나무로 만들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 작은 나무 하나가 얼마나 그렇게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분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나무를 너무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 때문입니다. 곧게 뻗어야 할 가지를 비틀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게 만듭니다. 자라고 싶어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분재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부모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성향이나 성품이나 재능대로 키우지 않고 부모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를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휘어 자기의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곧게 자랄 나뭇가지를 꺾고 휘는 것처럼 자녀를 그렇게 양육한다면 그 자식의 마음이 어떨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몇 해전에 방영되었던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휘고 꺾어서 어떻게든지 서울대학교에 가게 만드는 것은 자녀를 화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녀의 모든 것을 부모가 다 주물럭거립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가 그 가정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특히 아름다운 건축가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 불신시대에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자녀들이 살아남는 길은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각 가정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 127:1,2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한 솔로몬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가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3. 건강한 가정의 건축은 자녀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 자녀들에게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라는 말씀은 엡6:1절에 ’주안에서‘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는 그 말씀이 주 안에서 하시는 말씀일 때 비록 그 말씀이 나에게 불리한 것 같고 실천하기 싫고 힘 드는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자녀 여러분!!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부모입니다 . 부모가 없었다면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부모님이고, 가장 먼저 나를 사랑해 준 사람도 부모님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먼저 관계 맺는 대상이 부모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 나에게 사랑을 주어 생명을 잇게 하는 분이 부모님이기에 그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사람들이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녀의 입장에서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 부모님은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말입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밖에 해 주지 못하시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최선의 것을 주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9-10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이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물론 그 뒤의 말씀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 이어지지만, 거기까지만 읽는다면 아무리 세상에서 못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늘 좋은 것을 주길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주고 싶어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다 해 주면서도 늘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장(高麗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현대판 고려장”이 있습니다. 병에 걸리신 부모님을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행 시켜드린다고 모시고 가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를 “부모를 거역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부모를 버리는 안타까운 세대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쓴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정신의학자인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입니다. 1941년 어느 날, 그에게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빅터 프랭클씨, 이민 비자가 발급되었습니다. 찾으러 오세요.” 당시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시기인지라, 유대인이었던 그에게 그 전화는 생명을 보장해 주는 구세주와 같은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이민을 간다면 결국 노부모를 남기고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미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늙으신 부모님은 모두 수용소에 끌려가고 맙니다. 머리는 빡빡 깎이고 죄수복에, 목숨을 겨유 연명할 정도의 음식만 먹으며 매일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점점 몸이 망가져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아내와 부모님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습니다.
오직 가족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는 결국 살아남아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와 다른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라. 예상치도 않았던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바로 그런 힘을 솟아나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재산 7조 원을 가진 중국 조폭 두목이자 한룽그룹 회장이었던 류한(劉漢)이 지난 2015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집행 직전에 그가 눈물을 쏟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나는 내 야망으로 인해 소중한 것을 볼 수 없었다.”< /span> 재산7조 원을 가진 갑부가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여러분,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지금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 대로 우리가 건축가가 되어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창을 내서 우리 가정이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행복의 공간인 내 가정과 내 가족을 보지 못하게 내 눈을 가리는 무언가가 있진 않습니까? 그것이 성공일 수도 있고,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야망이나 내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내 가정을 바라보면 내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의 보금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오늘 바로 그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