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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하늘 문을 여는 기도 (약 5:16-1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6-05 | 조회: 313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문학가인 영국 켐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면 땅의 것은 덤으로 주십니다. 이 아침 모인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사십니까? 하늘을 겨냥하고 사십니까? 그러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을 겨냥하고 계십니까? 결국에는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1:4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은 내가 바라고 원해서 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여 택하셨습니다. 요즘 월드컵을 치루기 위해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와서 시합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뽑힌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축구 선수들 가운데 여기에 뽑혀서 태극마크를 한 번 달아본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국가대표에 뽑히고 그것도 주전선수로 뛴다는 일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저들의 자부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택해주신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런 자부심은 일류대학을 나온 것보다, 좋은 가문 출신이라는 것보다, 이 땅에서 큰 공을 세운 것보다 차원 높은 자부심입니다. 영원히 우리가 누리게 될 자랑스러움입니다. 벧후 1:10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무슨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유혹도, 어떤 박해도 하나님이 이겨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할퀴고 간 상처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코로나19 이후를뉴노멀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표준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탈종교화입니다. 어느 기관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39%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고 응답했습니다. 심각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이후로 비대면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여서 찬송하고,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교제하는 일들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만 드리고 그냥 가버립니다. 성도는 하나님과도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하지만, 성도간에도 인격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탈 종교화,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무너지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무거운 질문 앞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창립 53주년을 맞았습니다. 교회 창립 53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 앞에 아주 엄중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탈종교화, 탈기독교화되어 가는 이 세상의 도전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야라는 선지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죄와 부도덕이 난무했던 암흑기 역사의 무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불꽃처럼 사라진 한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요, 가장 부패하고 타락했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도무지 옳게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보는 것이 죄요 생각하는 것이 죄뿐인 모든 사람이 죄의 늪에 빠져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와 세상을 향해서 신앙의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면서 목이 터져라 회개와 부흥을 외쳤던 하나님의 한 사람!! 그가 엘리야였습니다.

 

불꽃처럼 살다 불기둥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엘리야를 대할 때, 우리와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마음에 새겨둬야 말씀이 있습니다. 5:17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어 파데스란 합성어인데 이 뜻은 엘리야도 다른 일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란 뜻입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현실적으로 동떨어진 사람이 아닌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 앞에서 주저 앉는 한계를 가진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함을 끌어내는 경험이 쌓여가면서 어느 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우리와 동일함에도 놀라운 역사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3년 반 동안 비를 멈추었다가 다시 내리게 하는 위대한 기도를 이루어냈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에 영적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늘 문을 연 기도의 사람으로 산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엘리야의 기도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적용하고 우리도 동일한 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1. 훈련의 과정속에 다져진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던 훈련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이라는 고난의 훈련장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라는 고독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새롭게 출현할 때까지 사울을 피해 온 이스라엘 전역을 도망다니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군림할 준비와 훈련을 했던 것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등장하기 위해서 훈련의 과정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처음 훈련 받은 현장은 그릿 시냇가입니다. ‘그릿이라는 이름의 뜻은 단절입니다.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고독한 광야의 흐르는 시내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뭄으로 인해 그릿 시내의 물도 말라버리자 이번에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돈은 이스라엘 땅 북쪽에 위치한 이방 땅입니다. 더군다나 그 시돈은 왕비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미움을 받아 현상수배범이 된 엘리야가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땅으로 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바라봄은 바로 기도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동안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들이 쌓여 가면서 응답의 누적이 믿음을 자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2. 엘리야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6절 하반 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의인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한 쌍입니다. 병행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도 자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응답을 믿지 않는다면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기도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확신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 시대는 불신앙의 시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왕상18:21절에 그들의 민낯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엘리야 당시 우상숭배가 만연한 세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왕비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죽이는 때에(왕상18:4) 그 누가 감히 나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겠습니까. 우상 바알을 숭배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하였을 때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머뭇거리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무엇인가 일어서겠다는 의지마져 꺽진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겠습니까? 원래 이 백성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도, 기백도, 담대함도, 사라져 버린 회색 신앙의 소유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배소 교회를 아십니까? 대단히 열심이었고, 말씀에 근거해서 거짓 교훈을 가려낼 정도로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었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가슴 가득히 밀려온 감격과,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던 황홀할 정도로 감사했던 마음,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겼던 뜨거운 열정을 만들어냈던 감격이 있는 교회가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에베소 교회는 그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일 그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네 금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금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됨을 소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에베소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지금 이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엘리야는 특단의 조취를 취합니다.

 

3. 무너진 단을 수축합니다.

 

왕상 18:30절에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여기 보면 엘리야가 머뭇거리는 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제단이 누가 제단이라고 이러주지 않으면 흔적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무너지고 부서져 버려서 흙더미만 남은, 가까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무너진 제단 앞으로 모이게 합니다. 화려한 바알의 신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초라한 제단이었습니다. 그 제단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맛보았던 바로 그 여호와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무너져 있었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 그곳은 지난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중에 임재 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깊은 교제를 나누시고 죄지은 인생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자비가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그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이 수축은 고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곳을 고쳐 세우는 것입니다. 회복을 말합니다. 나는 이번 53주년에 여러분의 신앙의 무너진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거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무너진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엘리야는 자신의 진액을 짜는 기도를 합니다. 17-18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특이하게 합니다.얼굴을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할까요?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간절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할 때, 죽기 내기로기도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생명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왜 기도의 간절함이 없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대안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카드가 아닙니다. 자신의 수없는 방법과 빠져나갈 구멍들을 준비해놓고 대충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직 답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간절함이 있습니다. 기도는 상상을 넘어선 결과를 가져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혹독하게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게 하고 땅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늘의 불을 제단에 제물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국가적 난제를 풀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아합 왕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기도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기 하늘 문이 열린다는 표현은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초월적 능력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을 푼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 문을 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늘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깨어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의 모든 닫힌 문들이 열릴 줄 믿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야고보가 강조하는 이유는 신자라면 누구라도 능력 있는 기도를 오늘도 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이 말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한 시대를 열고, 한 시대의 재앙을 끝나게 했던, 하늘 문이 열리게 했던 엘리야는 내가 가진 아픔, 상처, 고통을 가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기도의 자리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하늘 문을 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기도의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이제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새벽 한 주간 어두움을 가르고 주 앞에 나오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의 현실 앞에 마귀에 눌려 기도한번 제대로 못한 채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이제 함께 일어나 새벽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교회 창립을 통해 새시대를 여는 축복이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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