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냐?”,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기쁨'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롬14: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희락, 즉 기쁨'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살면서 아프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기도 하는 현실 앞에 주저앉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빌립보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대하는 이 빌립보서는 참 아름다운 서신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대부분의 서신을 보면 그 교회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독특하게도 그런 문제들보다는 오히려 그 교회를 향한 기쁨을 충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자주 들으면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교육과 학습에 있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반복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1절에 ‛나의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끝으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끝으로’라는 말은 ‛마지막으로’, 또는 ‛결론적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같은 말을 쓰는 것’이란 그 말을 반복하는 것이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수고로움이 없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위해서는 더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 사도 바울이 끝으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그만큼 그 말씀을 중요하게 새겨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바로 기쁨입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쁨의 서신’이라고 일컫는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란 의미의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말년에 병으로 인해 약해진 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절입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기뻐하라는 명령형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쁨의 생활이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 기쁨을 잃은 채 살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갔습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상황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셋째는, 죽음의 문제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 때문에,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두려움에 공포 속에 빠뜨리는 코로나19라는 우리에게 당면한 환경 앞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어찌 뿐입니까? 자고 깨면 죽음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년의 고독사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청년들도 요즘 삶의 탈출구가 안보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픈 현실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에게 처한 환경이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리어 디딤돌로 삼고 세상에 자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기쁨을 빼앗는 것을 강하게 외칩니다.
2. 삼가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성도로서 삼갈 것이 있습니다. 사도는 무엇을 삼가라고 이야기합니까? 2절을 보면, 다소 격한 표현이 나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 할례당'들은 다 약간씩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유대주의자, 또는 종교적 형식과 외식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유대 민족을 선택하실 때 기대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열방이 그 백성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보면서, 슬픔 많은 세상에서 참 인생살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도록 말씀을 주시고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도록, 그들이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복과 은혜와 특권을 전부 무엇으로 바꾸었습니까? 특권 의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특권 의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전부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들은 이 변질된 가짜 복음 앞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갈2:4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된 선동자들의 주장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특히 하나님 백성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변질을 가져다 주는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심각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이들을 삼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꽃도 보세요. 조화가 진짜보다 훨씬 더 예쁘고, 더 진짜 같습니다. 어디 꽃만 그렇습니까? 유명 상표를 모방한 소위 ‘짜퉁’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문가들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는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그래서 예전에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하는 노래가 히트를 치던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 중국에서는 계란도 가짜로 만들고, 심지어 가짜 고기까지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이 물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고, 프랑스 사람들은 “이 물건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 입니까?”라고 묻고, 미국 사람들은“이 물건 실용적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라고 묻겠습니까?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때론 가짜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갈1: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여기 다른 복음이 바로 가짜 복음, 변질된 복음을 말합니다. 보세요. 사이비나 이단들이 예수를 이야기하지만, 전혀 성경과 어긋납니다. 이단들이 하는 거짓된 가르침이 훨씬 더 감미롭습니다. 더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은 맨날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 이단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뭔가 신선하고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더 달콤합니다. 더 멋집니다. 그래서 이단인 줄 알면서도 그리로 갑니다. 그게 어리석은 인간들의 특징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다.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멋있고 달콤해 보였습니다. 정말 그럴 듯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라고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달콤한 말은 우리를 옭아매는 덫일 수가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논리와 사상이 더 깊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더 합리적이고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게 더 매력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과학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니까 뭔가 지성적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과학적 지식이 진리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현대의 사상과 이론이, 그리고 과학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 그 어떤 연구의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우리의 영혼을 팔아넘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은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 보면 당시 선민의식을 내세우며 자신들만이 ‘할례를 받은 언약의 백성이다’라고 외치는 형식적인 종교인들에게 무엇이라 반론을 합니까? 3절에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둘째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셋째가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건강한 교회는 자기 의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생수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 "성령으로 봉사하십시오." 여기서 '봉사하다'라는 단어는 '예배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예배하고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새롭게 바뀐 내면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실한 예배이며 봉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가르쳐 왔던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볼 수 없다”(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아무리 보여 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봉사할 때에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불평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어떤 방법으로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새 마음으로 예배에 나와야 참 예배가 됩니다. 그 새 마음을 담아서 드리는 섬김과 봉사가 진정한 성도의 섬김과 봉사가 됩니다.
둘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자랑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 출신입니다. 교육의 도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이 탄탄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그는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온 사람이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헬라문화와 헬라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사도 바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스펙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의 과거를 그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귀한 것들을 다 버린 것입니까? 그건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의 목적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지은 곡들은 장미같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얼마만큼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죽은 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안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치룰 돈이 없어 빈민구제위원에 장례를 맡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힘들고 고통 가운데 살았지만, 수많은 곡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 가운데 음악가가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바하가 죽고 난 후 200여 년 동안 그의 가문에서만 세계적인 음악가가 50명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비록 자신은 역경도 많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세계 음악사에 둘도 없을 정도로 음악명문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바하로 하여금 그런 복을 누리게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바하는 작곡을 끝내고 나면 오선지에 꼭 SDG라고 썼다고 합니다. SDG라는 말은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라틴어의 약자입니다. 그는 힘든 삶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음악적인 재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역경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곡했던 바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바하를 높여주셨던 것입니다.
셋째,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육체’는 헬라말로 ‘삭스’로 타락한 이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내 안에 죄성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원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육신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본성을 가졌고, 죄의 영향을 쉽게 받는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 문을 약간만 열어주어도 그 다음에는 마귀가 막 파고 밀고 들어옵니다. 죄를 지을 때는 감쪽같이 한순간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언어, 심지어는 능력, 기질까지도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죄의 성향으로 한 번 기울어지면 내가 가진 감정, 의지, 능력까지도 죄에게 헌신하게 됩니다. 죄가 마음대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누구든지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생활을 미온적으로 한다면 죄의 활동성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죄와 더 친하게 지낼 여지를 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 8:5-6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러므로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8:6)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졌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 안에서 샘솟듯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기뻐하고,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해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왜 세상적인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라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도 남들처럼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욕망도, 자신의 욕심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칭찬이 하나도 없어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귀함을 받으시고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 안에 구원의 기쁨, 지금도 차디찬 옥중에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 더 나아가 하늘의 영원한 소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