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맥추 감사 주일입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맥추 감사 주일은 도대체 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요즘 맥추 감사 주일 지키지 않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맥추 감사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로만 안다면 이 맥추 감사절 속에 담긴 풍성한 복을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올해 하나님께서 주신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정확한 대답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첫 수확일 수 있겠고 직장 다니는 사람에게는 첫 월급일 수 있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첫 매상 수입일 수 있겠고, 첫 배당금, 첫 계약금 첫 번째 태어난 아이 등등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를 꼭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의미를 모르면 우리는 그저 절기 헌금으로 마지 못해 드리는 정도가 될 수 밖에 없고 이 맥추감사주일은 사실 아무런 복도 은혜도 없는 주일이 되고 맙니다. “맥추 감사헌금? 당신이 알아서 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첫 열매를 거둘 때는 언제나 일 년 중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맥추절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신16:12절에 보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맥추절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첫 열매가 아니라 너희들의 지난날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들이 어떻게 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는지,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노예생활을 한 국민이 다시 독립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을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손으로 구원해 애굽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의미에서 이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단순히 올해도 첫 열매를 주셨다는 감사주일만이 아닙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스라엘에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맥추절은 엄청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7주 만에 지키는 절기라 하여 칠칠절이라 부르고, 또 오십 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이라 이야기하고,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라 하여 초실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언제 우리에게 임하셨는지 아십니까? 행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오순절은 맥추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맥추절을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 지켰기에 오순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그 백성을 광야교회로 조직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처음 익은 열매’인 구원의 감격을 가진 믿음의 자녀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이 맥추절을 대할 때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εω)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은 ‘카리스’(χαρισ)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원뜻 그대로 풀어보면 은혜가 풍성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감사란 은혜가 풍성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전부를 왜 감사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6개월간에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다. 감사하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염려하는 삶이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지난 6개월을 살면서 염려를 안 하고 사신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도 하루에 오미크론 확진자가 10,000명이 되는 시대에 우리에겐 불안과 염려가 있고, 지금의 경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 아닙니까?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습니다. 이런 상황의 늪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이런 염려 속에 빠지게 되면 감사가 메말르게 됩니다.
여러분, 염려라는 뜻은 헬라어로 '마음이 나누이다' 혹은 '목을 조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나뉘거나 목을 조르는 고통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복잡하고 잃는 것이 많습니다. 잠17:22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이 바로 염려죠. 이 염려가 결국 마음이 으스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게 몸도 망가뜨립니다. 가장 단단한 뼈가 마를 정도니 몸이 남아나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헨리 나우웬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염려한다는 건 뭐냐.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마음이 혹시로 가득찬 것이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멍청한 짓입니까? 이런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져 버립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오지 아니하는 내일을 놓고 왜 그렇게 염려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묶어 놓을 수 있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3가지의 감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감사라고 하는 쇠사슬로 염려를 콱 묶어 놓고 꼼작 못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감사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의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방울방울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조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우리에게 값 없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나와서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백성이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이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분명한 소속감과 ‘나는 주님의 피 값을 주고 사주신 가장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다’라는 가치감,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둘째로 '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의 감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필요를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32절에 가서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이 책임을 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보면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우리나라에 절기 따라서 왔다갔다 하는 제비에 대해서 어느 교수가 연구한 자료를 보니, 제비는 새끼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갖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갖다가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무려 15만 마리를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단 말입니다. '그 전능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날짐승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판에 있는 풀도 키우시는 하나님. 그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중요한 우리를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감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대한 감사입니다. 33절은 다 외우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여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범주에 있는 것들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데 있어서 매일매순간 급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선 당장 먹지 못하면 배고파 죽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으로 인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같은 급한 문제는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게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주일에 장사하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보다 시험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그래서 급한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주일 예배를 빼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 감사에로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모압 평지에서 맥추절에 대한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아 생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40년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끌려 우상 앞에 절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비단 이들 뿐입니까? 그들이나 오늘 우리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리석은 욕망의 껍질을 벗고 진실된 신앙인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감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보서 4:6-7절의 말씀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전히 우리의 삶에 염려와 걱정이 밀려온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밑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주님께 맡길 때 우리 안에 평안이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감사절로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말씀 속에서 염려를 감사로 바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을 염려하는 날이 아니라 감사하는 날로 만들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닫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저주는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름’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감사는 기적의 씨앗임을 알고 평생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