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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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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인생 기준(빌3:4-9) [빌립보서강해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7-10 | 조회: 250


위기의 경영, 삼성을 공부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입니다. 선발주자였던 일본기업이 몰락하고 후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우뚝 서게 된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위기의식이 있고 없고 있고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 고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하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이 삼성 성공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기업은 위기의식 없이 그동안의 성공에 안주하다가 몰락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개념차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위기감''위기의식'의 차이입니다.

 

"위기감은 '이 상황이 언제쯤 끝날까?' 또는 '얼마 동안 인내해야 하나?'라고 느끼는 소극적인 불안감에 불과하며, '위기의식''이렇게 가다가는 죽고말거야.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등 목숨 걸고 생존방법을 찾는 태도다.” 그렇습니다. 위기가 다가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결국 위기를 극복할 길을 찾습니다. 때로 자신이 세웠던 어떤 기준을 버리고 과감하게 헤쳐나갑니다. 삼성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위기를 돌파한 데 비해서 일본기업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혀 몰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붙잡히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인생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정한 기준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인생 기준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나는 어떤 인생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점검을 해야 합니다.

 

1. 바울의 인생 기준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여기 '육체를 신뢰할 것'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울이 가졌던 조건을 말합니다. 그것을 5-6절에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혈통적 특권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5절에 보면 나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여기 팔 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것은 순수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거기에다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최초로 왕을 배출한 지파입니다. 여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한 종교적, 민족적 자부심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이 탄탄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가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고급장교인 천부장도 그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돈을 주어 그것을 샀노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22:28) 많은 돈을 주고서라도 꼭 가져야 하는 것이 로마시민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이미 가졌습니다. 태어난 배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수저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자기 훈련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학문에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인 베스도는 사도 바울을 향해서 행전26:24절에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태어난 배경이나 자라난 환경과 스펙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6절에 보면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유대교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초대 교회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8:1-3절에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의 씨를 말렸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기준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열심을 갖고 이런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에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2. 인생의 전환점 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단어 유익과 해는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장사해서 이득을 보는 것과 손실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장사꾼들은 항상 이득을 보기 원하 지 손해를 보기 원치 않습니다. 기업은 이득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이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 훌륭한 스펙들을 예수 믿고 나서는 다 손실(손해)로 계산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얻는 것 하나로 만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기득권과 스펙을 버립니다. 여기 8절을 보세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 그의 삶에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동안 자기의 버팀목처럼 여기던 세상적인 것들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남들이 다 부러워한 것을 배설물로 여길만큼 포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 8절 하반절에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바로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때 예수를 경멸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경멸하던 예수를 위해 순교의 자리까지 설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겨지는 인생의 기준을 바꿀 수가 있습니까? 여기 안다는 말은 창4:1절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 단어입니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기며 새로운 인생 기준을 가진 것은 바로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줄 아세요? 제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19361211,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지금 이시간부터 국왕 자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된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왕의 자리를 내려놓는 이유가 뭐냐면 '내가 왕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여인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온 나라와 세계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왕의 자리를 내려 놓을만큼 사랑한 심슨이라는 여인은 미국 여자인데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무지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대영제국의 왕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그 강한 나라의 국왕이, 결혼도 안한 총 각이 심슨을 사랑한다 해도 어려운데 왕의 자리를 포기할 정도로 심슨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심슨도 너무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하고 본인이 반대했지만 에드워드 8세가 자살하려고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왕궁을 떠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할만큼 한 여인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가진 기준이 무너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했지만, 그것은 분명 생활의 어려움도 오고 고난의 상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기쁨을 준 것이 바로 9절입니다.

 

3. 인생의 최고의 기준.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여기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3:22절에 보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바로 이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 앞에 서니까 비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것입니다. 여기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바울은 어떤 문제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세상적인 열망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하늘을 향해 있었고, 그의 마음은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평생을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도 인간입니다. 그에게 왜 인간적인 욕망이나 인간적인 기대가 하나도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남들처럼 이름을 날리며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몸이 힘들면 쉬고 싶고, 고통과 고난의 길이 아닌 형통과 평안의 길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모든 욕망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신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악에 깊이 빠져 있더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다가 낙심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신앙의 회의 때문에 갈등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실패하여 일어설 힘조차 없을지라도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십자가 앞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십자가 앞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난날의 인간적인 욕구나 인간적인 열망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이 말은 짐 엘리엇이 남김 말입니다. 영원한 진리,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것까지 바칠 수 있는 헌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명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는 거의 3년 만에 여름 성경학교를 이번 달에 시작을 하려합니다. 우리도 아시겠지만, 사람을 세우는 일, 특히 자녀를 믿음으로 세우는 일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교사와 학생들에게만, 맡겨두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함께 시대의 거목을 키우는 심정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일상의 평범한 삶을 잃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경제력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잃기도 하고, 어떤 분은 마음에 여유와 행복을 잃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잃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사라질 때 우리는 조금 더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십자가의 은혜로 가득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었고,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산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최고 기준이었습니다.

 

오늘 예배로 모인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로 세상에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흘러가는 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살 것이 아니라 작은 송사리라고 할지라도 살아있는 것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길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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