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브로커들에게 수천달러씩 주고 트레일러에 숨어 밀입국하다가 중남미 출신자 46명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들은 열기와 산소 부족 등으로 목숨을 내맡긴 채 먼 길을 나서다가 당시 48도나 되는 폭염에 콘테이너에 갇혀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자기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불법 체류를 해서라도 들어오려는 것은 미국은 중남미인들에게 환상의 도시인 것입니다. 불법 정착 속에 미국 시민권자 되면 그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작년에 발표된 불법체류자들에게 8년이 지나면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이 법 조항 때문에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그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시민권만 취득하면 그들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도 로마의 시민권자들의 특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얻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생득적 시민권입니다. 로마 시민의 자녀는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이 됩니다. 둘째는 후천적 시민권 획득입니다. 로마 제국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거나, 혹은 사회적 지위와 돈이 있어 매수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경우입니다. 생득적 시민권자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천부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22:28절에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이 어려운 로마 시민권을 돈으로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의 국가요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제국이었습니다. 때문에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굉장한 특권으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더구나 빌립보 지역은 상당히 발전한 지역으로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세상 향락에 젖다보니 더 미상 거룩한 생활과 영적 즐거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인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속적인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적인 것을 위하여 마음을 빼앗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보다 더 귀하고 좋은 시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세상 것이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우리의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시민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Ⅰ.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절
오늘 본문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참 연약한 존재 아닙니까? 우리의 모델이 되기에는 참 많은 허물과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입장에서 문득 외로움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저를 사랑해 주고 좋아해 주죠. 그런데 해가 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저의 허물과 이런저런 연약함이 많이 드러나다 보면, 이렇게 사랑해 주다가 다들 등을 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핑계 댈 수 없을 만큼 큰 잘못을 했을 때, 진실로 옆에서 "목사님, 저희도 그래요. 우리는 목사님을 충분히 사랑하니까 끝까지 같이 갈 거예요”라고 말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목회의 길이 참 외롭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목사로서 모범이 되라고 말하지만, 그런 아픔과 짐들이 한번씩 밀려오곤 합니다. 사람은 모범이 되기에는 한계가 많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다약해서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받아 주고 지켜 줘야할 대상이지, 본이 될 수는 없는 대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모범이신 우리의 구주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때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출신입니다. 교육의 도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이 탄탄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그는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온 사람이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헬라문화와 헬라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의 스펙으로 말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부활 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난 이후 사도 바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스펙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의 과거를 그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귀한 것들을 다 버린 것입니까? 그건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에 보면,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채 재판장인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그 중요한 시간에,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얼마나 당당한 고백입니까? 이렇듯 단호한 표현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변화, 예수 믿고 나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 그 삶의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받느라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모방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방해야 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그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된 것처럼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점점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변질되어 사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17절에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그런 행실을 하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믿음을 지켜가는 많은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마음에 담아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본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Ⅱ. 십자가의 원수들 18절
너희들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18절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이런 자들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알기 때문입니다. 잠깐은 흥청망청하며 여름 잡초처럼 번성하며 즐거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원수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또 당시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한 짓을 일삼는 경건치 뜻한 사람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19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들의 특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신神으로 삼습니다. 여기 배라는 말은 ‘속이 텅빈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세상의 것들을 채웁니다. 당시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로마에는 육신의 배를 채우며 쾌락을 즐기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특별히 먹는 문화가 발달해서 로마의 귀족들은 보통 오후 4시에 식사 자리를 시작하면 자정이 넘도록 식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배가 가득 찰 정도로 부르면 새의 깃털을 목구멍에 넣어 음식을 토해내고 다시 먹기를 반복했습니다. 식사하는 동안 식사복만 무려 10번 이상을 갈아입기도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첩들이 부채질을 하고 소년 노예가 나뭇가지로 파리를 쫓고 여자 안마사는 사지를 주물렀습니다. 한 끼 식사를 위한 돈이 노예 하나를 판 값과 비슷했습니다. 오직 자기 배를 신처럼 떠받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인생의 유일한 관심과 소원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며, '어떻게 하면 육신을 더 편안하고 즐겁게 할까?'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도 자신의 배와 육신의 즐거움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모양새와 즐기는 내용이 다를 뿐 본질은 같습니다. 끝없이 육체의 욕망을 채우고 먹고 즐기기 위해 삽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의하면 말세 때는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의 원수들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십자기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마땅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해야 할 것을 영광으로,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언젠가 공중목욕탕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눈앞에 걸어 다니는 동양화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용, 뱀, 여자 문신을 한 서너 명의 험상궂은 사람들이 목욕탕 안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등만이 아니라 다리와 팔에도 문신이 있었습니다. 대략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문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욕탕 안의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니까 조심해, 까불지마!" 이런 무언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왠지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개하고 가치관과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들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죄 짓는 일을 유쾌한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더 큰 죄를 지을수록 더 남자다운 줄로 착각했다. 나의 동료들은 그런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만나 새 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바울 당시 기독교 신앙에 아주 위협적인 철학 사조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신적 쾌락주의를 주장한 에피큐리어니즘인데, 그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까지 교묘히 스며들어 이단적 가르침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정신과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굴려도 전혀 죄가 안 된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하며 육신의 정욕을 따라 더럽고 짐승 같은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이런 철학적 사조가 일부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썩을 몸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 생각에 물든 성도는 신앙양심을 다 버리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짓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 영광으로 여길 일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땅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 명예, 쾌락, 세상적 인기와 성공만을 목표로 삼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신앙생활조차도 땅의 것들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이용하고 주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리와 명예를 탐하고, 자기 이익을 탐하다가 목적이 성취되지 못하거나 도움이 안 되면 심지어 신앙에서 떠나기까지 합니다. 이 세 유형의 사람들은 파멸을 향하여 맹렬하게 달려가는 브레이크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곧 부딪혀 망할 지름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Ⅲ. 우리의 산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20절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는 말은 이미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믿는 그 순간 바로 하늘에 시민권을 부여받습니다. 이미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싶어도 살아지지 않는 이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서,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직면하면서, 그 아픔과 눈물을 갖고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나요? ‘목이 빠질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학수고대’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학수고대’와 같은 애절한 기다림은 아니라 할지라도, 살면서 기다림에 대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기다림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기다리게 하신 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만들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430년이란 정말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내몰린 후 40년의 세월을 기다린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21절에 보시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재림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영광스런 주의 나라의 영원한 승리자로 설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그네의 길은 때로는 어려움이 있고, 때로는 고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기 위해서는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산다는 것, 그리고 이미 하늘의 시민권자로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안다면 롬8:18절에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말씀처럼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 땅에서 예수 향기를 발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근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닙니다. 이오니카 선교사로 떠났다가 꽃한번 피지 못한채 순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