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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 (빌4:1-3) [빌립보서강해1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7-31 | 조회: 262

 

오래전 개성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상도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핵심 주제로 전하는 상인의 도는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였습니다. 돈보다 인관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말입니다. 요즘처럼 가짜를 만들어서라도 이윤을 남기려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줘도 나만 잘되겠다는 식의 상도덕이 무너지는 시대에 신선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목사로서 목회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목회 역시 한결같이 '사람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남기는 일입니다.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요,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를 위해 한평생 수고하다가 이제는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요, 자부심이 있다면 다름 아닌 빌립보 성도들입니다. 비록 그는 감옥에 갇혀 어떻게 될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지만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그의 내면은 감사와 기쁨으로 풍성했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바울은 원래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것을 막으시고, 그를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유럽에 건너와서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한 곳이 바로 빌립보라는 성입니다. 그는 드로야에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빌립보로 갔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꿈이었고,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말씀을 따라 간 이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당한 어려운 시련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빌립보에서 한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 불쌍한 모습을 보다 못한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고 그 여종을 자유케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못된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서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깊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신을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는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깊은 감옥에서 전화위복이 일어납니다. 자신을 심문하던 간수의 온 집안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자주 장사를 하던 루디아의 집에서 유럽의 최초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탄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그와 함께한 성도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나요? 심지어 바울이 선교할 때마다 헌금을 만들어 준 교회 그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자랑이요 나의 면류관인 성도들을 향하여

 

.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1절에 주 안에 서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160회 이상 정도로 주 안에서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의 서라는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굳게 서다, 견고하게 서다, 요동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전쟁터에 수많은 위험이 있지만 군인이 그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지켜낸다는 의미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경기 중에 너무 지쳐서 기권하고 싶지만, 절대로 기권하지 않고 끝까지 경주를 달릴 때 쓰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이 닥쳐와도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실망합니다. 목회자에게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할 때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자꾸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처절한 경험이 있더라도 주 안에 서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위치해야 합니다. 가서는 안 될 자리에 서 있으면 곧 실족하게 됩니다. 반드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잊어버린다면 불행을 겪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서는 결코 안 됩니다. 때로는 힘들고 괴로워도 언제나 주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어려움을 이기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신앙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주 안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바울은 나의 자랑이요 나의 면류관인 성도들을 향하여

 

.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립보 교회는 차음부터 비교적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형성하는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성도사이에도 인간관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두 여 성도 사이에 존재한 갈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오디아나 순두게는 모두 여성들의 이름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여성인데도 아주 유력하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나뉘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도의 교제 가운데 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상처를 입게되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어떤 사람들의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할 때 그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주장의 배후에는 종종 자기 신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 자기의 생각을 믿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양보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깨뜨리고 상처를 입힙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자신이 모든 세상의 중심에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 방식이 옳고 내 경험이 옳다는 자기중심성이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분쟁과 나눔과 다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오고,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한 몸에서 난 형제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성이 만들어 낸 분쟁과 다툼입니다. 창세기 5장에 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아도 다 죽습니다. 분리가 일어납니다.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나뉨과 분쟁과 다툼과 끝없는 싸움, 시기와 질투와 경쟁. 이것이 죄가 가져온 인생살이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이런 권면을 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앞서 자랑이요, 면류관이며, 기쁨이라고 고백한 것과 달리 이들만 생각하면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자식들이 서로 다투고 갈등할 때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왜 분쟁하고 갈등했을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마음이 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성적 문제도 아니고 진리를 위한 싸움도 아닌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감정싸움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 때문에 싸움이 났을까? 아마도 높아지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높아지려는 마음이 상처 난 마음과 결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대개 다툼은 교만과 상처가 함께 작용할 때 발생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바울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라고 말합니까? 이런저런 개인적인 문제로 부딪힌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해도 온전히 한 몸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한몸 되려면 한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 됨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마귀는 언제나 이간질과 분열의 역사를 조장합니다. 에베소서 110절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은 강압적인 통일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 됨은 획일적인 강압과 통제가 아닌 내적이고 자발적인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 된 것처럼 보이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질서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고 모두 하나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하나 된 듯 보일 수도 있지만 내적인 하나 됨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 된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의견이 통하고 마음이 비슷하고 생각이 같아서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이념 공동체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각이 같기 때문에, 마음이 통하기 때문에 함께 모이고 하나 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귀한 말씀 때문에 사랑하는 지체들이 나의 기쁨이고 면류관인 줄 알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문제가 없어야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문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남 이야기 하지 말고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나 같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문제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세상 과 다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연합하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지, 무엇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가려고 하는지가 교회와 성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주님의 귀한 말씀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 교회입니다. 지금 깊은 감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 함께 멍에를 메고 도우라고 말씀을 합니다.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여기 멍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시골에 사셨던 분들은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쟁기를 끌게 하여 논이나 밭을 가는 장면들 보셨을 것입니다. 보통은 소 한 마리가 끌지만 어떤때는 두 마리에게 같이 쟁기를 씌우고 끌게 하기도 합니다. 북극이 가까운 추운 지방에서는 썰매를 타고 가는데 수십 마리의 개들이 함께 썰매를 끌게 합니다. 한두 마리로 하면 힘들겠지만 수십 마리가 함께 끄니까 쉽게 빨리 잘 갑니다. 교회의 일도 그렇게 여럿이서 함께 멍에를 매면 쉽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 서서 나를 세워주고, 나를 풍성케 하시기 위해 함께 하시는 멍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 맞는 고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습니까? 서로 맞지 않아서 오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부간에도 맞지 않아서 사네 안사네 고통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혼률이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이혼사유 1위가 성격차이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 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그러니까 70이 다 된 부부가 황혼 이혼을 하겠습니까? 또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막상 들어가 생활해 보니까 도저히 맞지가 않아요. 그러니 그 순간부터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 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 교회도 예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은 이곳에 이사를 와서 6달 동안 이 주변 교회를 다 다녀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맡기고 또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만한 교회에 대한 신중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동역자란 누구입니까? 3절의 표현대로 하면 함께 멍에를 메는 자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짐을 함께 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해병대 훈련 중 가장 힘든 것이 8명의 해병대 대원들이 한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행군하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이런 행군을 하루 종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체력과 정신력이 거의 한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때 함께하는 대원들 중 한 명이라도 요령을 피우거나 낙오를 한다면 다른 대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이런 상태를 말한다. 운명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묻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던지고 목회했던 빌립보 성도들을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처럼, 저도 목사로서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분과 함께 목회하면서 부족한 것도 많고 연약함도 있지만, 저 역시 한순간도 여러분을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으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제 머리속에 떠오른 표현인데 참 멋진 말입니다.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국적이 바뀐 것도 아니고 피부색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못난 얼굴이 잘 생겨졌다거나 못 살던 사람이 잘살게 된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앞으로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의 아픔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픈 순간이 우리의 삶에 오더라도 같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서러 섬기며 서로 겸손하며 서로 용서하며 갑시다. 다른 지체들의 문제라고 여기면서 지나가지 말고, 내 문제인 것처럼 같이 짐을 지고, 힘을 다하여 화평하게 합시다. 우리는 차이와 다름이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이고 단일한 모임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름다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차이와 다름으로 인해 풍성해지도록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히머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연합해서 그런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나의 자랑이요 나의 면류관이 되는 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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