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기쁨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런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설교를 들으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나는 이 기쁨을 알고, 이 기쁨을 누리는 사람인가?’를 자문자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린 아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루 400번 이상 방긋 웃는 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기들을 보면 방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웃는 모습에 매혹되어 우리는 아기들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기쁨 없는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기쁨이 송두리째 다 쓸려가 버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크고 작은 기쁨이 그 속에 담겨 있기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과연 얼마나 죄많은 세상에서 웃으면서 사셨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불의와 위선을 가진 인생을 만날 때, 그리고 죄인을 볼때마다 주님은 슬퍼했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예수님은 33년의 삶을 사시면서, 그리고 3년 동안의 공생애 가운데 한 번도 웃지 않으셨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부분의 예수님 그림은 근엄하신 얼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70명의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온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누가복음 10:17) 전도하러 갔던 제자들은 귀신들이 쫓겨나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뻐하며 돌아와서 자기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보고합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할 때 ‘기뻐하다’(카라)는 단어는 흥분된 상태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도하러 나갔다가 귀신 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그러자 귀신들이 항복하고 떠나갑니다. 귀신 때문에 괴롭힘을 받던 사람들이 치유되고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흥분되고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누가복음 10:21)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귀신들을 제압하고 복음을 전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예수님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할 때 ‘기뻐하다’는 단어는 ‘제자들이 기뻐했다’고 말할 때 쓰인 단어와 다릅니다.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단어는 ‘흥분된 상태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할 때 쓰인 단어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 춤을 추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하고 제자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십자가를 위해서 오시긴 하셨지만 늘 십자가의 고통만을 생각하며 사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의 고통만을 생각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사셨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숨이 막혀 예수님 곁에 머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잔치를 즐기실 때 예수님께서 심각한 표정으로 잔치자리에 앉아 계셨다면 그 잔치가 잔치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실 때에도 늘 근엄하신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식사를 하셨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식사를 끝마치고 나면 늘 배탈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늘 근엄하게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중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참 흥미진진한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성경을 읽으면서 이 본문만큼 마음에 가책을 주는 본문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사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이때 사도 바울이 당한 형편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생애 최악이었습니다. 첫째, 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혈기방장하던 젊음이 다 시들었습니다. 용기도 꺾이고 꿈도 사라질법한 노구가 되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위해 온 정열을 다 기울였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다 늙었습니다. 둘째,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육체적인 상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온몸은 매맞은 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돌로 쳐죽임을 당할 위험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지금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습기는 차고 햇볕조차 들지 않는 차갑고 어두운 감옥 속에서 노구를 끌어안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셋째, 옆에서 바울을 돕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도 다른 교회들을 돕기 위해 모두 떠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혼자 남았습니다.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고, 정신적, 영적으로도 외로웠습니다. 이런 처지를 당한다면 아마 건강한 사람이라도 지레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 어느 구절에서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한다. 기뻐한다. 기뻐한다. 너희도 기뻐하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며칠 있으면 목 베임을 당할 사형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명령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이토록 외롭고 병약한 한 노인을 이렇게 당당하고 용기 있고 강하게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울이야말로 우울증에 걸릴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병들었고, 정신적으로 외롭고, 자식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Ⅰ.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 (In Christ), 여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안에서’라는 말이 160회 이상 쓰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성서신학자는 바울신학의 요점은 '주 안에서'라는 이 표현 속에 다 들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로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이 한마디 말속에 다 녹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평안할 때가 언제입니까? 과자 먹을 때? 우유병 물고 있을 때? 아닙니다. 엄마 품속에 안겨 있을 때입니다. 흙으로 빚어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부음 받은 인생들이 영육간에 가장 평안을 누릴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했습니다. “주여, 제가 당신 앞에 무릎을 끓기 전까지 제 마음엔 결코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적으로는 비록 어두컴컴한 로마의 지하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는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세상 그 어디도 하나님의 품속이 아닌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고통의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 어디인들 하나님의 품속이 아닌 곳이 있으랴.”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이 땅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이 세상 온 우주 중에 하나님의 품이 아닌 데가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기뻐하되
Ⅱ. 항상 기뻐하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4절에 “항상 기뻐하라”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하’라는 말은 언제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졌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 안에서 샘솟듯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기뻐하고,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해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힘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앞으로 벌어질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몰라 두려운 상황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세상이 가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바로 사랑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할 때, 그리고 우리 주님처럼 내가 받은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흘려보낼 때 그 사랑은 우리에게 충만해집니다. 고후6:10절에 보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온통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에게 근심만 안겨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난한 자일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나눔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도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Ⅲ. 다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4절에 ‘다시’라는 말은 ‘새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늘 기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떤 때에는 뜻하지 않는 환경의 문제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상가들이 비어져가는 데가 많아졌습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어렵다 보니 염려 속에서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관계로 인해 기쁨이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문제는 내가 가진 기쁨이 송두리째 사라질 만큼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계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나옵니다. 주님은 첫 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의 수고와 인내를 했던 교회였습니다. 또 복음전파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여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단이나 교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처리할 정도로 진리 위에 바로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초대 교회뿐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모든 교회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계2:4절을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 ‘첫사랑’이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가슴 가득히 밀려온 감격과,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던 황홀할 정도로 감사했던 마음,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겼던 뜨거운 열정을 만들어냈던 감격이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에베소 교회는 그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일 그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네 금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금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됨을 소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에베소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에 대한 구원의 감격 속에 주님과의 첫사랑을 여전히 간직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감격이 나를 감격스럽고 황홀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오래된 교회,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사람들이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할 주님의 경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능력은 바로 기뻐하는 삶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그것을 깨닫고 기쁨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감격 속에 신앙생활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신앙행위가 있었습니까? 주님을 생각하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지요? 날 새는 줄도 모르고 기도도 해보셨지요? 내가 믿는 예수가 너무 좋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처럼 예수 믿고 기쁘게 살아보라’고 전도도 많이 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렇게도 미웠던 사람들이 천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우리가 가져야 할 주님이 원하시는 ‘처음 행위’입니다. 첫 사랑의 행동을 되찾아야만 첫사랑의 감격이 우리 안에 오래 오래 간직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셨다면 첫사랑의 자리를 추억하시면서, 또 첫사랑의 감격 속에 행하던 모든 신앙 행위를 다시 찾으셔서 첫사랑의 감격으로 기쁘게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빌4:4절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우리가 구원 얻을 때 주님께서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저마다 해결하기 힘든 문제 때문에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사태의 힘든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길어지면서 모두가 지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아주 특별한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이 힘든 시기를 능히 이겨낼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고 우리에게 이겨낼 힘을 줄 것입니다. 이 은혜를 힘입고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