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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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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13-15) 8.15 광복절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8-14 | 조회: 185


우리는 오늘 우리나라 광복 77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자유와 주권을 빼앗 겼던 일제 36년은 가장 불행한 시기였습니다. 1919822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하나가 된다.’는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고, 일주일 후인 829일 그 조약이 공포되고 발효되면서 우리나라는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458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우리 민족은 영토와 주권과 자유를 잃고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일제는 우리를 보란 듯이 압제했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일본의 노예였습니다. 딸들이 정신대로 끌려갔고 아들들은 강제노역으로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깊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타협하고 체념했습니다. 너무나 강력한 일제 앞에 주눅 들었고 매사 눈치를 봤고 비겁해졌습니다. 장장 36년 동안 그랬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이름도 잃어버렸고 언어도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릴 듯한 암흑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815일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날,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광복절. 흔히 다른 나라들은 독립기념일이라 부르지요. 우리도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굳이 광복절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광복절,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8.15해방을 빛을 되찾은 날, 즉 다시 세상이 시작된 날이라 했겠습니까?

 

그런데 빛을 되찾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들이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문을 닫거나 강제로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가 미미한 교세임에도 불구하고 항일에 앞 장 섰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이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광복 77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간 결코 일본의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유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항상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77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광복절의 의미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셈이라는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전시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지어 놓고 그것을 야드바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기억하라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글귀를 새겼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6백만 명이 넘는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유태인은 이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억압을 당하거나 자유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자유를 얻었지만 종의 멍에를 다시 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오직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증거했습니다. 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복음은 당시 바울이 피를 토하듯 외친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기만하면, 죽음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합니다. 15:1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전면 부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2절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4절에 보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왜 무서운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잘못된 이단에게 빠지지 않도록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회복시키조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굳건하게 선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도 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이 자유를 더욱 더 삶속에서 나타내기 위해서 바울은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며 섬겨야 함을 말씀합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우리는 무엇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단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자유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어떤 목표를 위해서 쓰여질 것인가라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로 남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너희들 서로의 관계에서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종노릇'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섬김'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께서 종이 되셨습니다. 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마침내 식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기 시작하십니다. 아무도 종이 되려 하지 않을 때 주님이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육체의 기회란 타락의 기회, 다시 사단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을 말합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은 방종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신 그 사랑을 가지고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왜 종노릇 해야 합니까? 자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어진 자유가 잘못된 가능성으로 떨어지지 않게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사랑으로 종노릇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미움의 종이 아니라 사랑의 종입니다. 자유라는 높은 목적을 위한 종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 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런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날 일본에 식민지로 자유를 빼앗기고 포로로 갇혀 있었을 때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 때엔 힘 있는 누군가가 밖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인이 되었기에 우리에겐 힘이 생겼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지키는 일은 그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해야 할 자세를 바울은

 

. 우리의 과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14-15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일제의 핍박 속에 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도저히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된 지 77년이나 지났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또 다른 고통의 역사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허락하셨는지, 그리고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끝은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광복을 주신 목적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에게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국의 통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적 섭리로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때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국의 통일을 지켜내고 하나 된 통일조국을 세계 속의 선진 강국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우리의 헌신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14-15절에 말씀처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진 민족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과 북은 아직도 긴장 관계죠. 주변의 열강들속에 우리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마지막 때에 이 민족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화가 무슨 꽃입니까? 얼마 전에 마당에 무궁화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서 보니까 밝은 햇살을 받아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무궁화는 장미꽃 같은 정열은 없습니다. 벚꽃 같은 화려함도 목련화 같은 우아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합화 같은 수려함도 코스모스 같은 청순함도 없습니다. 무궁화는 왠지 촌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화가 마음에 끌립니다. 무궁화는 은근과 끈기의 꽃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 4시쯤 피기 시작해서 질 때는 다섯 꽃잎이 하나가 되어 얌전히 오므라들어 꼭지 채 떨어집니다. 다음날 아침에 수없이 피어 있는 무궁화는 전날의 꽃이 아닌, 모두 새롭게 피어난 꽃들입니다. 매일 모두 새로운 꽃을 100여 일 동안 끈질기게 이어 피우는 꽃입니다. 또 토지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랍니다.

저는 이 무궁화를 보면서 이 꽃이 괜히 우리나라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는 931번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난 전 세계 유일한 민족입니다. 은근과 끈기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국화로 무궁화는 적절합니다. 무엇보다 무궁화를 사랑하는 것은 샤론의 장미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무궁화의 영어 이름 (rose of sharon)은 샤론의 장미, 샤론의 꽃이라는 뜻입니다. 찬송가 89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에서 샤론의 꽃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에서 사론의 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애국가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로 생각이 되니까 이 무궁화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36년의 세월 속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러나 그 고통의 현장에서 8·15 해방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까. 마치 무궁화처럼 끈질기에 다시 일어서서 나라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우리의 선조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해방은 어느 날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은혜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당했던 참극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 것 사실입니다. 이단에게 시달리고 사탄이 제철 만난 듯 믿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자녀들이 방황을 합니까? 이제 먼저 믿은 우리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의 힘듬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르게 지키지 못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겸손하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맡긴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다음 세대에게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이 민족 위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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