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중국의 톈진 동물원에서 갑자기 판다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얌전하던 다른 동물들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원 관리원들이 시립 지진국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얼마 후 톈진에 진도 7.4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시립지진국은 이것을 지진 전조현상으로 보고, 미리 대비해서 지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동물들은 어떻게 지진 발생을 미리 감지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왔지만 아직 확실한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동물들은 인간에게는 없는 어떤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런 동물들의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서 지진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체계를 세워보려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가 코로나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서서히 코로나의 길고 어두웠던 터널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긴장의 끈을 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기를 힘쓰지 못했습니다. 맡은 바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회도 그렇고 성도들 자신도 스스로 양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다시 모이기를 힘쓰며 또 맡겨주신 사명에 그 전처럼 헌신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안에 영적인 태만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에게 영적인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태만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심할 경우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믿음이 흔들리고 믿음의 가문의 대가 끊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쳤지만, 바울은 위기를 분명하게 감지했습니다.
그중에 제일 심각한 문제가 바로 교회 안에 이단들의 침투입니다. 빌3:2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 할례당'을 삼가라는 말은 이들은 종교적 형식과 외식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방해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창궐하고 있던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 이단이 지금 빌립보 교회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직 그 수가 미미하여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지만, 그냥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4장으로 넘어가면 교회내에 분쟁입니다. 소위 지도자의 갈등입니다. 빌4: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자신이 모든 세상의 중심에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 방식이 옳고 내 경험이 옳다는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분쟁과 나눔과 다툼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온 인생살이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이 분쟁은 분열로 엄청난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아쉽고 한 시간이 아까운데 감옥에 무려 5년씩이나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갇히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 상당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 바울은 무엇이라 외칩니까?
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치열한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키시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루레세이'는 '호위하다'는 뜻의 군대 용어입니다. 군인이 어떤 지역을 경계하며 방어한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군인이 어떤 지역을 방어하듯 하나님의 평강을 지켜야 합니까? 사탄의 세력이 온갖 방법을 다해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공략하기 때문입니다. 벧전5: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삼키는지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공격합니다. 잘못된 생각과 마음이 일어나도록 조장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입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는 악한 영들이 우리를 향해 불화살을 쏜다고 증거합니다. 악한 자들의 불화살이란 고통과 상처를 주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소진시켜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악한 영향력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마음과 생각은 그냥 지켜지지 않습니다. 지키기 위한 영적인 싸움이 필요합니다. 잠4:23절에는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쉽게 방심하는 영역이 바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부분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근원이 되는 마음과 생각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을 생각해 보십시요. 처음에는 겸손하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타나자 사탄이 그 마음에 불붙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심어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역시 잠시였지만 욕심을 부추기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요13:2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벌써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쁜 생각을 넣으려고 노력합니다. 행5:3절에 부흥하는 초대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의 영향력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 위기의 한 복판에서
Ⅱ.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7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먼저 염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는 사실에다 비유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합니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안 움직입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만 요란합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한 겁니다. 쓸모없는 겁니다. 그걸 왜 해야됩니까? 벧전 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지금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사실 이런 권면은 바울 스스로의 신앙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했으며, 외롭고 우울하기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겪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더욱 치열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빌립보 교회를 포함한 하나님의 교회들은 어떻게 될지 수많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들이 불화살처럼 바울의 마음에 쏟아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방패로 그 모든 불화살들을 막아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각'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나 논리를 뜻하는데 그 인간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그것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평강을 바울은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경험적 확신으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권합니다. 기도를 멈춰서도 안되고 기도를 포기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염려의 안개가 앞을 가려도 흔들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크고 작은 문제와 어려움으로 낙심하고 우울하게 보내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터져나갈 정도의 분노와 고통으로 힘들어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때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때보다도 더 큰 열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전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살해 위협에 도망 다니다가 유대 광야에 있는 아둘람 동굴로 피신했을 때의 기도시입니다.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나락에 떨어졌을 때 지어졌습니다. 이 기도문을 보면 처음에는 억울하고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어조의 기도가 드려집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무르익어갈 무렵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굳게 정했다는 고백입니다. 더 이상 울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하고 찬송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달리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생각이 바뀌니까 기도도 달라집니다. 절망의 동굴에서는 도무지 드리기 어려운 승리의 기도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변화가 왜 일어났습니까?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이 그 마음을 온전히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믿음의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하나님의 뜻대로 내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고 조율되는 과정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 눈앞에 실상으로 나타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평강으로 임한다는 것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Ⅲ.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일까요? 시인 정호승의 “스무살을 위한 사랑의 동화”라는 시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 널 강하게 하기 위해서야./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넌 뿌리가 약해/ 어쩌면 금방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자꾸 불어오니까/넌 쓰러지지 않으려고 깊게깊게 뿌리를 내린거야./ 그게 다 바람이 널 위해서 한 일이야./ 사실 우린 바람에게 감사해야 돼./
바람이 강하게 불면 나무는 너무 힘이 들어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바람 때문에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크고 강한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나무에게 바람은 불평거리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감사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만 보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바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감사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6:10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세 명의 총리와 120명의 관리를 세워 통치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최고의 자리에 앉히려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유대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고, 자기들의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총리와 관리들이 시기하며 음모를 꾸며 다니엘을 죽이려 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절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게 만든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보란 듯이 창문을 열고,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니엘이 감사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 같았으면 기도를 쉬었을 것입니다. 30일이 지난 뒤에 다시 기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더라도 문을 닫고 남몰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상황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상황에서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결코 지금의 상황이나 현실 앞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이 그의 심령 속에 생수처럼 흘러 넘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위기 가운데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의 기도를 더욱 힘있게 해 줍니다.
코로나가 발발한 이후 2년 반 가까이 우리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이 나도 우리가 겪는 위기는 오히려 더 심각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하듯 맞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배를 전쟁하듯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자리가 위태롭습니다. 예배를 영으로 진리로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예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하듯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기도를 쉬는 사람들, 기도에 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하듯 기도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현실의 위기를 분명하게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가지고 위기를 마치 전쟁하듯 싸워 이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 위기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마치 전쟁하듯 위기와 맞서 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