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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빌4:10-13) [빌립보서강해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8-29 | 조회: 267


 

스포츠나 연예 분야에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프로야구나 프로골프 선수들 중에 데뷔 첫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사람들이 두 번째 시즌 때는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말입니다. 그리고 가수나 배우들 가운데 첫 노래나 첫 작품을 크게 히트를 친 사람들이 다음 노래나 작품에 부진한 경우가 많아서 생긴 말입니다. 첫해에는 크게 성공을 했지만 주위사람들의 높아진 기대치와 과도한 중압감 등이 겹쳐서 다음 해에 슬럼프에 빠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요? 작년에 그렇게 잘 됐었는데 금년에는 잘 안 됩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또 저렇게도 해 보지만 역시 잘 안 됩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 이유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컨디션도 괜찮고, 여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주변에서 왜 그러냐고 묻는데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영적인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남다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앙생활이 힘이 듭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적인 기쁨도 사라집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열심을 내려해 보지만 잘 안됩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슬럼프입니다. 코로나사태로 이런 영적 슬럼프를 겪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사태로 예배현장에 나가지 못하고, 교회를 멀리하면서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영상예배를 드리는데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의 감동도 느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호화스러운 로마의 어느 별장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질법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독야청청 할 수 있었을까요?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합니다. 무려 16번이나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뻐하라고 강조할 수 있을까요? 요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하는 시절에 신앙의 슬럼프가 점점 길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여기 어떠한 형편에든지라는 말을 직역한다면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삶이 궁핍할 수 있고 때로는 몸이 약해져서 활동하기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이 아플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의 어깨에 지워져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궁핍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믿음이 변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신앙인의 품위를 유지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문제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한때 힘든 관계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씀은 이전에는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협력하지 않았다가 이제 다시 사도 바울을 돕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데다 나이 들고 몸까지 약하기 때문에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에서 힘들게 삶을 버텨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은 빌립보 교인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이 끊기자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누구나 살아감에 있어서 물질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 뗄레야 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배부름과 배고픔의 문제보다 더 현실적이고 절실한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비천에 처하거나 풍부에 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주 열악한 경제 상황에 빠져 있는분들도 있을 것이고, 비교적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1997년 한국의 IMF 때 한순간에 모든 사업과 재산이 날아가 버린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어떤 분들은 자기 생명을 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경제적 재난이 가져다 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국가적인 부도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개인의 삶 속에는 끊임없이 경제적 굴곡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참으로 힘든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란 늘 변화무쌍하게 흐릅니다. 누구나 비천에 처할 수도 있고 부요한 환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씀하는 가난함과 부요함, 배부름과 배고픔의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자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사업이 무너지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물질의 문제뿐 아니라 권력의 자리에 있던 사람도 갑자기 찾아오는 삶의 위협 앞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경기도 '수원 세 모녀' 사건은 우리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까? 엄마는 암 투병, 두 딸은 희귀병, 남편 그리고 아들은 먼저 세상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보증금 300만 원, 월세 40만 원 집에 살면서 병원비 때문에 월세도 못 낼때도 있고 기초생활 수급도 신청 안해서 긴급복지나 의료지원도 못받다가 결국 극단적이 선택을 한 것입니다. 너무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코로나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것에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때가 어쩌면 우리가 더욱 신앙의 훈련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족하는 것입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며 사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여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 배움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11 -12

 

다시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배웠다'는 말속에는 시간과 과정과 훈련이라는 말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자족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자족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과 아픔을 견디어내야 했습니다.

 

고후11:24-28에서 고백한 것처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으로 맞은 것도 세 번이고, 돌로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고, 거센 풍랑을 만나 일주일 동안이나 바다 깊은 곳에서 두려움 가운데 지내야 했습니다. 여러 차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살해 위협도 당하기도 하고, 이방인들에게도 그런 위협을 당해야 했습니다.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 갈증에 허덕이며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상황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모든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다 이겨냈습니다. 그라고 왜 불평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어찌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이 힘들 길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도대체 이 고통 속에서 절망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습니까?

 

어느 날 예수님이 마11: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 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30절에 보시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멍에란 단어는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예수님과 동행의 기쁨을 그 누구보다 깊이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족하기를 배웠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당대 최고의 강대국에서 공주의 아들로서 병법과 학문과 웅변과 지리 등을 익힌 40세의 모세를 40년간 광야에 보내십니다. 광야라는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간 모세는 40년 동안 무엇을 배웠을까요? 비천에 처해서 자기를 깊이 부정하고, 내가 얼마나 짐승 같고티끌 같고 먼지 같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깊이 자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40년 후에 들어 쓰십니다. 세상의 일꾼과 하나님의 일꾼은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소위 말해서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좋은 데로 유학 가서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면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바닥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비천에 처해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멸시와 수모를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바닥에 처할 때 억울해하고, 갑절로 갚아주려고 하고, 남들의 작은 쓴소리 하나 못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신실하게 살면서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쳐서 죽인 백전 용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탁월한 하나님의 일꾼에게 기름 부으셔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 전에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배워야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비천에 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수모당하는 사람, 멸시와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배움의 열매입니다. 지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 주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13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로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 '긍정적인 사고' 등 자기 암시용의 심리적 위안거리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영어로 I can do it.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여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 안에서라는 말이 160회 이상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적으로는 비록 어두컴컴한 로마의 지하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는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세상 그 어디도 하나님의 품속이 아닌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신념과 신앙의 혼돈입니다.

 

신념은 내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이 되지만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신념의 출발점은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신념의 근거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내재되어 있어 마음으로 이 능력을 길어내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그렇게 전지전능할까요?. 그렇게 강합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작은 병원균에 목숨을 잃고, 작은 일에 상처받고 시험들고 방항하는 아주 연약한 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교만하게 내가 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라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살다보면 문제 앞에 넘어지고 좌절하고 쓰러지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기에 넘어지는 자리에서 좌절하는 자리에서 쓰러지고 주저앉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다윗이 이런 고백을 드렸다고 해서 그의 삶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는 시편 23편을 쓸 때 가장 어려운 인생의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사울 왕에 의해 죽음의 그림자를 밟으며 좇기는 상황입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삶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자리는 힘들고,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지만 그는 항상 주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3: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의 고백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는 것만이 인생의 지름길임을 잊지 마십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내일 일을 우리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하더라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다. 묵묵히 앞서 가신 주님께 시선을 떼지 않고 주님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가십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한 삶을 사는 방법은 주님께 나를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며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손실이 있어도 건강의 어려움이 있어도 좀 답답하더라도, 자족하기를 배우며 주님의 뒤를 따라 가십시다.

 

때로는 주님이 가리키는 곳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열 발 앞, 또는 수백 발 앞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를 따라 다시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서 맡긴 사명 잘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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