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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하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 (빌4:21-23) [빌립보서강해 1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9-11 | 조회: 235

라이너 마리아 릴케20세기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가 한때 14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를 뜨겁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불같은 사랑을 시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눈빛을 가려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지 않고서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 없이도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당신 손으로 꺾어 주십시오. 그래도 내 가슴으로 당신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도려내 주십시오. 그래도 내 뇌는 당신을 향해 뛰놉니다/ 당신이 내 뇌 속에 불을 놓으신다면 내 핏속으로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릴케는 이 시의 제목을 사랑의 포로라고 붙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온통 그대뿐입니다. 가슴 속에도, 머리속에도, 심지어 피속까지도 온통 그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대를 향한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던 릴케도 시간이 지나자 달라졌습니다. 점점 그 마음이 루 살로메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불같던 그 사랑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 사랑에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영원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바울의 빌립보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1:8절에 보면 바울이 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나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바울은 고난 한복판에서도 이 빌립보 성도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심장도 아니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하고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토록 사랑한 성도들을 향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말씀을 끝내고 있습니다.

 

오늘로써 빌립보서를 마치려고 합니다. 참 아쉬움도 많고 저의 부족함 때문에 말씀 속에 담겨있는 바울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와 빌립보교회를 위해 수고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손편지로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수고와 헌신을 마다하지 않고 충성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인사를 합니다. 이는 정말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수고한 사람들을 바울은 결코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 문안의 의미

 

특별히 우리가 문안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2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성도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문안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말에는 '거룩하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삶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비범하고 특별하지는 않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자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아이 낳아서 기르고, 돈 벌어서 노후를 안정되게 살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하고 인정받을 만하게 사는 게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 땅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라와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석같이 존귀한 자들입니다. 직업이 뭐든 관계없습니다. 남들이 볼 때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높은 신분을 갖고 있어야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귀한 부르심 때문에 우리는 모두 존귀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분들도 있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뭔가능한 일을 하지 못하고 한계와 실패를 경험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귀한 부르심 때문에 그분들도 너무나 존귀한 자들입니다.

 

시편 16편을 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16:3). 우리 옆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이며, 예수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자입니다. 옆에 있는 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기 시작해야 교회가 달라지고, 우리가 속한 사회가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서로 문안하고 사랑하고 보살피고, 서로 중심에서부터 사랑을 담아 관심을 표현하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존귀하게 바라보면서,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살아 있는 관심과 애정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문안입니다.

또 누가 문안합니까? 21절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여기서 '형제들'은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있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문안하는 공동체인데, 형제들을 문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즐겨 사용했던 단어가 바로 형제라는 단어입니다. 명사 아델포스는 연합을 뜻하는 아(a)'자궁'을 뜻하는 델프휘스에서 유래한 합성어인데 이는 '같은 태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 형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들'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동성 교회 성도 역시 다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모습도 다 다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요, 할례자들에게는 무할례자였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는 그 언약과 무관한 사람이었고, 하늘의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편도 다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믿음의 형제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문안하는 중에 한 독특한 무리가 나옵니다. 22절에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중 몇이니라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가이사의 집 사람들 몇이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에 보면 황제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로 나와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언급되는 가이사의 집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친족이거나 아니면 로마 황제의 녹을 먹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바로 귀족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가이사가, 로마의 황제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발본색원해서 처형을 시켰던 자입니다. 그 악명 높은 네로 황제의 궁전에까지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어떻게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는데 재판중에 있는데 그가 갇힌 곳이 바로 1:13절에 황제의 시위대가 있는 감옥입니다. 이곳은 당시 음모를 꾸미거나 정치적인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여기에 쇠사슬에 매여 최종 판결을 받는 절망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죄수들을 지키는 사람을 아무나 세우지 않습니다. 특수한 군인들을 세우는데 여기에 주둔한 군인을 시위대라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 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이었고, 그러기에 아무나 시위대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 정치의 핵심이요, 로마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 즉 황제숭배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철옹성 같은 벽을 쌓고 있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매임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 상황을 통해서도 로마의 핵심부에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있었지만, 바로 여기에서 복음의 열매가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전도 될 것 같지 않은 가이사의 집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감격이겠습니까? 교회 역사를 보면 근 300년 동안 기독교 10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엄청난 핍박 속에서 마침내 기독교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카타쿰이라는 지하 동굴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로마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세운, 세워야 할 태신자도 이와 같은 심정으로 세우고 그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수고를 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지금 바울이 하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3절의 축도로 빌립보서를 마무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여기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를 맺으면서 은혜를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모든성도들이 은혜 안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은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따져 봐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 누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방송을 통해 어떤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분이 믿지 않는 남편을 겨우 설득해서 어렵사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며 흘렸던 눈물이 얼마며, 또 남편 전도하려고 아니꼽고 치사해도 참고 견뎌온 세월이 얼마인지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날 남편이 교회 가겠다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날따라 목사님이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헌금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던 목사님이 왜 하필이면 이날 그것도 십일조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설교를 들으며 좌불안석입니다. 목사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동안 애써왔던 것이 다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속이 상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으로 남편의 핍박이 더 거세져서 자칫 자기도 교회 다니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듣는 남편 눈치를 보니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남편이 뜻 밖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보! 내가 그동안 술 먹고 담배피고 못된 짓하며 없애버린 돈이 얼마나 많아, 그걸 하나님께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이 권사님은 너무 놀랐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 이것이 은혜로구나. 남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구나! 남편이 이제 구원받았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도와줘서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믿게 해 주시고, 결단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거친 세상, 어디하나 기댈데가 없는 절망의 환경 가운데 다시 일어설수 있는 힘, 그 힘이 바로 우리 심령에 은혜의 생수를 채우는 것임을 알고 옥중에서 기쁨의 찬 자신의 고백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이 감옥에서 벗어나기를 위해 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담밖에 사는 자들을 돌보는 이 모습이 얼마나 얼마나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럽습니까? 우리는 지금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들을 문안하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거듭남의 확신이라든지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가운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문안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생수가 흐르기를 기도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그의 삶을 살면서 참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요 증인으로 살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지 않고 오히려 출세하고 평탄한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 때문에 그는 참으로 많은 고난과 역경과 박해를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 생활을 잘 하면 고난이 사라지고 형통한 길을 가야 합니다. 병이 치료되고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려 할 때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병고침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를 받고 어려운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신이 아닌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살았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향기를 풍겨내 박해의 현장이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통해 잊어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세상이라는 가시에 찔릴 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향기를 드러내야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 자아라는 단단한 껍질이 깨어질 때에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가시에 찔려 내가 아파할 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쁨의 향기, 섬김의 향기로 말입니다. 나의 냄새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로 말입니다.

 

문안하라. 문안하라 왜 이 말을 깊은 감옥에서 외쳤을까요? 자신은 죽어가는데 오히려 고난 한복판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 이 바울이 그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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