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기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병원에 가는 일입니다. 의사 앞에 몸을 보이고 지시 받는 게 싫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싫은 일이 병원 가는 일입니다. 남에게 스스로 진단받는 사실이 왜 그렇게 싫은지요. 여러분도 아마 싫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후유증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기 때문에 병원의 중요성과 진단 받는 일과 처방을 꼭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여러분, 왜 병원에 가기가 싫습니까? 여러 가지 중 하나가 아마 불길한 생각이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살기 위해서 그렇게 가기 싫은 병원에 가야 합니다. 그렇게 만나기 싫은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부인들도 남 앞에 몸 내놓기를 그렇게 부끄러워 하면서도 살기 위해서 의사 앞에서는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내놓습니다. 그걸 보면 부인들도 염치도 없습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신뢰하는 의사를 찾아갑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돌려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진단 받는 것을 죽어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빛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싫어합니다. 내가 만약에 완전무결한 건강을 가지고 있어서 전혀 흠잡힐 만한 것이 없다는 자신만 있다면 병원에 안 가도 됩니다. 의사 앞에 나를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가봐야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종합진단을 받으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행여나 뭔가 하나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까? 완전무결한 사람 같으면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면 자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왜 싫어합니까? 뭔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본 바탕에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싫어하는 본능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별 도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먼저 하는 분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실패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사명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말씀하신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3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제자들의 실망감은 너무 컸고, 그들은 권력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들이 살아왔던 갈릴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일에도 베드로가 앞장 섰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자 나머지 여섯 명의 제자들이 따라나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에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나는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긴 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라‘나 같은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놈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제자로 살지 못할 것 같으니 옛날 고기잡이하며 살던 그때로 돌아갈 거야.’ 그러면서 갈릴리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지난날 삶을 가졌던 갈릴리로 사명을 포기하고 옛날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3절(하). “ ...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밤새 헛그물질만 한 것입니다. 헛수고였습니다. 빈 배의 공허와 허탈뿐입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날이 새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빈 배를 몰고 포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실패하게 됐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실패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베테랑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로 갈릴리 바다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갈릴리 바다에는 고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종도 무려 32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밤 시간이 고기를 잡는 데 가장 좋은 시간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많이 잡을 만한 좋은 조건들입니다. 그런데도 실패한 겁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습니다. 실패할 이유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누가 실패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하는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니까 더욱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들 가운데 모시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4절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며 그들 곁에 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알아보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옆에 두고도 마치 고아처럼 지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 아무리 재주를 부리고 노력을 해도 헛수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5-6,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7명의 제자들은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지만,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헛수고를 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날이 밝아올 때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거십니다. 7절에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정말 고기를 잡았나 못 잡았나 알려고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너희 인생의 수고의 열매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여러 말씀을 듣고, 이제 부활의 주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삶의 태도가 잘못되어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이 이미 그곳에 오셔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그들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력으로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들끼리 협력도 해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탕입니다. 밤새 ‘헛그물질’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육지를 향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빈 배, 빈 그물, 빈 손, 빈 마음, ... 이것은 주님을 등진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인생들이 인생의 갈릴리 바다에서 저마다 큰 고기를 가득 낚으려는 야무진 꿈을 안고 그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진 채 인간의 자력으로만 사는 인생은 결국 헛그물질만 하다 끝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여정을 다 끝내고 임종의 순간을 맞이할 때 빈 배만 남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는 태도와 방식이 전혀 불신자처럼 하나님을 등진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본문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 만사 세상 만사가 하나님 손 안에 예수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등지고 주님을 떠나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죠.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아무리 발버둥치며 애를 써봤자 헛될 뿐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때로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쓰러지고 넘어져도 그래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인생살이에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좌절해서 모든 것이 다 싫어질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안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Ⅱ. 순종과 불순종과의 차이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던 그 때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지금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갈릴리 호수가 달라진 것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기술이 더 많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물이 더 튼튼하고 좋은 것을 바뀐 것도 아니고, 고기잡이를 도와줄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던 지난밤과 많은 고기를 잡았던 지금과 상황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습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그곳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난밤에는 주님 없이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아니 주님의 낯을 피해서 갈릴리 호수로 도망치듯 와서 고기잡이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고기를 잡았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환경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실패를 극복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기적을 체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섰다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결코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 곁에 계신 보혜사 성령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성령께서 내 삶을 이끌어 주시길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답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용기를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Ⅲ. 사명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18절
오늘 본문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본문 속의 베드로는 지금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20대 청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기간은 이제 겨우 3년에 불과합니다. 이 시간 이후 사도행전, 즉 새 시대의 막을 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 헌신한다고 했지만, 모두가 허망한 세상 권력 앞에 무력한 모습입니다. 그동안 제자로 부름받았지만, 공허한 갈릴리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것을 움켜쥐기 위하여 욕망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 헛그물질 하느라 안달하던 삶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한평생 중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참된 사도로 살아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주님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에 의해 판가름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사명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 주님을 저주하던 베드로, 목적을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살던 그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자들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주님 앞에 다시 달려온 베드로! 주님은 다시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하늘의 능력을 덧입습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산헤드린의 서슬퍼런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합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로 순교의 자리에서까지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년 반 동안 계속된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예배나 신앙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일상이 회복되면서 교회가 무엇에 최고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나지신의 회복과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감입니다.
금번 2022년 터치 153 새생명 축제의 핵심은 바로 먼저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들로부터 당회원, 중직, 제직들이 각자의 정한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합니다. 목장지기, 기관 교회 학교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153의 기적의 핵심은 모든 동성가족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터치 153 새생명 운동을 하면 3가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잃어버린 양을 찾는 생명을 살리는 기적입니다. 둘째, 다음 세대가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다섯째,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기적입니다. 기대하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가면 틀림없이 153의 기적이 임할 줄 믿습니다. (기도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