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라 (잠23:22-25) 2010. 5.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5-09 |
조회: 2511
이도환 씨가 쓴 글 가운데 “나물 파는 어머니”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 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시장 근처를 지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다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의 소원처럼,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인 아내를 얻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병원도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지난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고향에 있는 모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저를 맞아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선생님은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입을 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쌓여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지.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거야. 포대기에 쌓여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기 위로 철근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지.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기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어.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았단다…….” 이젠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분들은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속 썩여 드린 일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 속에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또 삶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실패와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 끼쳐드린 것 등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이 생각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걸어 가다가 시원한 냉수 한 그릇만 얻어먹어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평생 동안 우리를 위해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우리가 모른다면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마땅한 도리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즐겁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길이겠습니까?
1. 부모님께 청종하는 자녀가 되야 합니다. (22절 상)
22절을 보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고 말씀합니다. 여기 청종(聽從)이란 말은 말 그대로 잘 듣고 순종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엡6:1절에도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청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가 해야 할 일이요.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것은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기본 원리를 세우신 것처럼 인간 세계에 기본 원리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희생하고 자식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세계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부모가 나 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사랑을 쏟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시고기와 논바닥에 사는 우렁이를 아실 것입니다. 부성애가 강한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 가시고기는 소설로서 더욱 유명합니다.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숫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죽은 아비의 사체를 다 뜯어 먹습니다. 그렇게 다 주고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부모들은 여건이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너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부모의 은혜를 알려면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 사랑을 다 깨달으려면 내가 부모님의 그 나이가 되어 보아야 압니다. 그러나 그때 "이제는 효도 해야겠다"고 느낄 때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치 않는 것이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은 내가 알고 받을 때 보다, 모르고 받을 때가 더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2.부모님을 존중해야 합니다.(22절 하)
여기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여기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뜻입니다. 이 공경한다는 단어는 성경 원어 헬라어로 ‘티마오’(timaw)인데, ‘가치를 인정하다’ ‘존귀히 여기다’ 등의 뜻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 원어 히브리어로는 ‘카베드’인데, 본래 ‘간’(肝)이란 뜻이 있습니다. 간은 인체 가운데 크기에 비해 아주 무거운 부위입니다. 그래서 ‘무거움’이란 뜻도 있고 간의 기능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러니까 공경한다는 말은 부모를 무겁게, 귀중하게 여긴다, 존대(尊待)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재미교포 가운데 상원의원 신호범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떠돌아다니며 거지 생활을 하다가 다행히 미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됩니다. 그 후 미군 장교 집에 입양되어 미국으로 갑니다. 그때 나이가 19세였습니다. 입양될 수 없는 나이였는데, 하나님의 기적이었죠. 공부를 한 적도 없었던 그가 영어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박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워싱턴州 상원의원이 됩니다. 출세한 것이죠. 한국에 방문하는 기회가 여러 번 생기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수소문해서 찾아갔더니 판자집 같은 데서 새 어머니와 이복 동생 5명이 가난하게 삽니다. 그런데 찾아갈 때마다 아버지가 술이 취해 계십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한번은 연락도 하지 않고 급습하듯 찾아갑니다. 맨 정신이지만 아버지가 돌아앉아서 말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대뜸 물었습니다. “왜 그때 나를 버렸습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 핏줄을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때 나는 머슴으로 팔려갔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오면서 가슴에 맺혔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후 부모님과 이복동생을 모두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생활 기반 잡아주고, 공부시키고, 일체를 도와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신 장로님의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미국 사람인데 식구들에게 직접 영어를 가르쳐주고, 경제적으로 도와주느라 아르바이트를 하고 ... 전심으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면 못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래야 됩니다. 부모가 무엇을 해 줘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3.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25절)
자! 25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효도란 다름 아닌 父母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부모의 마음이 즐거울까요? 용돈 몇 푼 드리고 효도관광 한번 시켜드렸다고 부모님의 마음이 즐거울까요?
뭐, 다른 것 없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23-24절을 보세요.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여기 진리를 사거나 판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진리는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그것을 얻기 위하여는 모든 희생과 가치를 지불하라는 것과, 한번 얻은 진리는 결코 망각하지 말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의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이신 예수를 붙잡고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한 생을 사는 그러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기에 크게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65세 이상이신 분들이 100여분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많은 분들이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이 때문에 얼마나 근심하는지 모릅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젊을 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참 충성하고 헌신 했는데 이젠 모든 것이 예전 만 못합니다. 그 분들의 소망은 다른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 그렇게 성공은 못 했다 할찌라도 부모가 한 생을 붙잡고 사셨던 그 예수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소망인지 모릅니다. 바로 자녀들이 예수 안에 살아갈 때 부모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권사님이 간절하게 두 가지를 놓고 기도 해 달라고 합니다.
①자녀들의 믿음의 회복 ②자신이 이제 이 땅에서 마지막 남기고 가야 할 일이 있는데 당신이 머무는 이 집이 팔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수중에 이 것 밖에 없으니 이 집을 팔면 건축 헌금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 분의 마지막까지 소망하는 자녀 구원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노년기를 지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노년은 상실의 삶이다. 건강, 돈, 일, 친구 그리고 꿈을 잃어버리는 삶이다.? 노년은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자기 삶을 지탱해 준 것들 하나씩 잃어버리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시기입니다. 바로 무너져 가는 그 자리에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삶 이것이 바로 자녀가 부모에게 해드려야 할 도리입니다. 효도 효자는 어떻게 씁니까? 늙을 노(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라면 누구나 이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어버이가 없으면 그 누구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부모님께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양육의 빚’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 그분들의 수고와 희생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그분들의 돌보심과 사랑 없이 가능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혹여 나를 위해 부모가 아무것도 해준 일이 없더라도 존경하고 효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제가 학창 시절에 국문학 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양주동선생님의 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앓을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버이의 정성은 그지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버이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버이의 사랑은 지극하여라“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겠습니까?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겠습니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겠습니까? 어버이의 희생, 어버이의 정성, 어버이의 사랑보다 더 넓고, 높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여기 자녀들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너무 많아서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울면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느라고 흘리신 땀과 눈물을 모은다면 목욕을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효도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후회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시기 바랍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아무쪼록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실천하므로 해서 이 땅에서 잘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 본문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합니다.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