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그 어떤 계절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보다 진지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줍니다. 넓은 들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그리고 시장에 가보면 각종 과일이 진열된 모습을 보면서, 이번 기도원에서 길을 걷다 보면 가을비를 맞고 떨어진 낙엽의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가을 태양에 누렇게 익은 벼라든지, 과일이라든지, 떨어지는 낙엽이라든지 저들 역시 엄청난 자연의 환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환경을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이 자리에 있으며, 장차 무엇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일컫는 스펄젼 목사는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런던에 한꺼번에 5000명을 수용하는 엄청난 예배당을 지었고 목회자라서 한시대에 영향력을 끼쳤던 그였지만, 내적으로는 스스로 버텨내기 힘든 심한 우울증과 통풍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주일에 교인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수없이 이 강단에서 들었던 꼭 같은 메시지를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전하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 이것 하나 다시 전하고 저는 가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자기를 17살에 목사로 삼으시고 지금까지 붙들어 주신 것은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뼈속까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 견딜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내 한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주님께 기꺼이 자신을 비치게 됩니다. 스펄젼은 그렇게 설교한 다음에도 15년이나 더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정말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지는 요한은 본문에서 이 십자가의 사랑을
Ⅰ. 어떠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떠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떠한’은 원어로 ‘포타포스(potapos)'입니다. 이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8:27에 보시면 예수님이 풍랑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는 제자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할 때 그들은 ‘어떠한(potapos)' 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다 담아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어떠한 사랑’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을 주사’ ⇒ 여기 ‘주사’라는 표현도 샤워하다는 의미로 쓰여진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그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젓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고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 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기록한 요한의 별명이 뭐였습니까? 막 3:17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여기 보아너게는 ‘우레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과격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을 지나시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사람들이 이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화가 나서 눅 9:54에 보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평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잘 알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배척한 그들이 괘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베풀어주셨던 은혜로 모르는 못된 놈들’이라고, ‘그런 놈들은 당장 불살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갑자기 요한이 자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이런 청을 드렸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메시아로 등극하실 텐데 그 때 자기 형제를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둘을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가는 마당에 얼마나 철부지 같은 이야기입니까?
그런 그가 점점 달라져갑니다. 초대교회 교부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주후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밧모섬으로 유배당합니다. 요한은 그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고, 다음 해인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자 사면을 받아 에베소로 귀환하여 에베소 교회를 돌보면서 요한복음서와 요한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마지막 목회를 할 때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강단에 설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약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원했고, 강단에 선 그는 항상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말만 반복한 것에 대해서 성도들이 불평하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욕심이 많고, 권력에 목말라하고, 성격이 불같은 요한이 왜 그렇게 변한 것입니까?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사랑의 사도가 되게 만든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아무리 훈련을 해도 불같은 성격이 온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바뀐 원인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어떠한 사랑을 주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랑’라는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은 이 엄청난 사랑을 입고 사는 우리에게
Ⅱ.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마땅하다라는 말씀은 빚을 진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갚아야 할 당연한 책임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 갚으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파산을 당합니다. 지금 요한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은 자신도 그 사랑을 위해 목숨마져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요한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의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의리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특히 도리를 지키기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그 도리를 지켜갈 때 그 사람을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들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주님께 대한 의리를 잘 지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늘 그 사랑을 갚을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실 때 그 사랑을 갚았습니다. 더더욱 자기에게 큰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랑을 갚으며 살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여러모로 위기 가운데 있지만, 그 가운데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 코로나 후유증입니다. 한때 그렇게 열심내던 사람들이 점점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는 아픔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의 위기 앞에 과연 나는 신앙의 도리를 지키고 살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침체 되어가는 현실 앞에 복음 앞에 받은 사랑을 당당히 증거하는 이 땅에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전세계의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당당함. 복음에 대한 의리를 보면서 우리도 ‘마땅하도다’ 당연히 해야하는 자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위기와 침체를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40년전에 우리 조선에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피 뿌린 신앙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느 무명의 선교사가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쓴 편지를 읽어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내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여있겠군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 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 되는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의 열정과 헌신으로 자기 심장을 미지의 땅 조선에 묻었던 한 무명 선교사의 편지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습니까? 오늘 우리도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사랑’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사랑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오직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요한은 이 어떠한 사랑을 삶에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Ⅲ. 나누라는 것입니 다.
17-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내가 받은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 아닙니까? 사실 전도는 희생없이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동안 영혼의 삼고초려를 하십시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고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지위나 나이나 체면도 내려놓고 친구와 이웃을 눈물로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여러분의 발걸음마다 친히 함께 하시고 생명으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 동성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불붙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희생없는 전도는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견딜수없는 감격의 희생입니다. 이제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소망을 안고 전 교인 새벽기도회를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때 좀 우십시다. 능력 달라고, 나에게 영혼 사랑하는 마음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그 십자가의 사랑을 입었다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태신자에게 다가가서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반드시 성령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