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가 오늘 예배로 모인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든 원치 않지만, 때로 실패를 겪게 되고 쓰디쓴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이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한 반응들을 공(ball)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리로 만든 공과 같은 반응입니다. 유리로 만든 공은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유리로 만든 공처럼 실패하고 좌절을 겪으면 부서져버립니다. 무력감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쇠로 만든 공과 같은 반응입니다. 쇠로 만든 공은 바닥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쇠로 만든 공처럼 실패하고 좌절을 겪으면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고무로 만든 공과 같은 반응입니다. 예를 들어 농구공은 바닥에 떨어지면 리바운드되어 다시 튀어 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농구공처럼 실패하고 좌절을 겪으면 잠시 힘들어 하다가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회복하고 재기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이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를 한다면 ‘같은 일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게 되는 것이 싫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고생과 희생을 더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일, 좌절감을 가져 오는 일, 대가 지불이 큰일일수록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이럴 때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거나 회피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과 같으십니까? 심리학에서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고 회복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을 ‘회복탄력성’이라고 합니다. 이 회복탄력성이란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 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말합니다.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하면서 우리는 사실 지금 시기에 무슨 전도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상당히 냉소적인 반응이 있었던 던 것이 사실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교회는 직격탄을 맞았고 한 조사 기관에서는 한국교회 가운데 1만여 교회가 문을 닫았는 통계를 냈고, 아예 신자 가운데 소위 가나안 교인이 200만이 넘는다는 이런 이야기 앞에 우리 교회 역시 30%에 가까운 성도들이 3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이 현실 앞에 이렇게 한다고 될 수 있는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것도 시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태신자가 56명이 1,2,3부에 초대에 응했습니다. 한동안 안나오던 분들 역시 10여명이 오셨습니다. 더구나 우리를 격동시킨 것은 교회학교 학생들이 영아부에서부터 중고등부까지 15명이나 나온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숫자입니다.
참 감동이 아닙니까? 단 한 영혼도 소중한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성도들이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에 순종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전도가 안된다는 현실 앞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이 함께하시고 우리가 마음을 합하면 얼마든지 복음의 열매가 맺힌다는 소망을 가지고 본문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 볼 느혜미야서는 그냥 덮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문제를 만날 때, 이것을 어떻게 회복해 나가는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느혜미야서는 한마디로 꿈을 꾸다 멈추어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다시 일어서는 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하는지라.”
유대인 출신으로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느헤미야는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예루살렘 성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공격해 오면 대책 없이 당해야만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희망을 안고 바벨론에서 70년만에 조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란과 능욕을 당하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그 당시 예루살렘 길에는 날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내면과 삶 속에 희망이라는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희망과 도전이 자라야 할 사람들 속에 상심과 비탄의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로 점차 성벽은 무너지고,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 – 이것이 바로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혜미야는 어떤 반응을 했습니까? 4절은 느헤미야의 반응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렇게 해서 그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고향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기 시작했던 때가 1:1을 보면 기슬르월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3원달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가 은답되는 것이 2:1절에 보면 니산월입니다. 이는 우리로 7월입니다. 그러나까 느헤미야는 안타까운 고향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지가 벌써 네 달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페르시아 땅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크게 출세해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조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자기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잠시 자기도 유대인이기에 마음 아파하긴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체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슴 깊은 곳이 안타까움을 묻어 두고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마치 부모님이 위독한 것처럼, 가정에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자기 신변에 큰 위기가 닥친 것처럼 말입니다. 저명한 구약신학자 가운데 ‘헤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대표적 저서가 ‘예언자’입니다. 이 책에서 이분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한 마디로 설명했습니다. 바로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여기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자신이 사는 곳에서 1,600Km나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취한 행동이 4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까? 성벽이 불타고 훼파되었기 때문입니까? 고난 앞에 고통받는 그것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들의 가슴에 타오르던 꿈을 포기한 모습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다시 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건(再建)’ 영어로 ‘Rebuilding’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서에 단순히 건물만 Rebuilding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도 Rebuilding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시간, 우리 역시 우리의 심령과 우리 가정들과 우리 교회가 Rebuilding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회복을 넘어 부흥이 아니겠습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느혜미야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울며 기도합니다. 모두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현장에서 그 환경을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뿐 아니라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가르쳐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story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이 그분에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1.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여기 5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문제가 여전히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결국 우리는 그 문제아래 눌리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거친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속에는 우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믿음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여지 없이 물 속에 빠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크게 보여도 아직 주 하나님이 더 크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Ⅱ.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에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신약은 오신 메시아와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합니다. 약속의 궁극적인 초점은 구원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 우리를 죄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견고하게 닫혀 열 수 없는 절망의 성 앞에서 의심하며 낙심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가 죄 지은 모습으로 있으면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에는 나를 붙들지 아니하는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붙들고 주장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과 함께 신실하게 이행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5절의 하반부를 보십시오. 그는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고 기도합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엡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긍휼이 흘러 넘칠 만큼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5)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불러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았다면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눈에 들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삼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지 성경을 아무리 뒤져 봐도 대답이 안 나옵니다. 궁휼은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아니하면 숨도 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느혜미야의 기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패배로 몰아 놓았던 현실 앞에 느혜미야의 기도처럼 크신 하나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주의 은혜 앞에 설 때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궁휼을 보았습니다. 수십년에 걸쳐도 안되는 일을 불과 52일 만에 성벽이 건축이 됩니다. 그 무너진 터 위에 백성들은 일어섭니다. 그들은 깨닫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 할지라도 성벽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벽 안에 거주하는 자신들의 태도였습니다. 이젠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들 속에 회개가 일어납니다. 이 회개는 그냥 정의 변화가 아닙니다. 새로운 결단입니다. 자신들의 삶에 하나님을 높입니다.
다음 주면 종교개혁 5백5주년을 맞습니다. 제가 다음 주 설교를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회개를 강조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주어지며, 돌이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살아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사회 변화를 일으켰던것입니다.
여러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의 과정에서 반드시 회개가 나의 삶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REVIVAL)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던 자가 소생하는 것, 침체되었던 자가 활력을 되찾는 것,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부흥입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치료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안에서 회복과 부흥을 경험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일에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