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지난 505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칼빈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혁(Reform)’이라는 말은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 판을 짜는 혁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질되고 탈선된 것을 본래의 길로 돌려놓고 그 원형을 되찾게 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유대나라 16대왕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부 므낫세와 부친인 아몬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악으로부터 하나님 종교로 개혁하는 일을 과감하게 단행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타락하고 종교적 본질에서 이탈하게 되면 백성은 정신적인 혼미에 빠지게 되며 죄악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이런때는 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고의 신호를 울리며 분연이 일어나 개혁운동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와같이 살아 있는 생명 운동의 몸부림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 하나님 종교의 개혁자였던 요시야의 사적을 보고 이 시대의 개혁운동의 재 발견을 찾고자 합니다.
Ⅰ. ‘오직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24절 상
24절 상반절입니다. “요시야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드라빔을 없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수호신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나올 때, 그의 아내인 라헬이 자기 아버지가 아끼던 드라빔을 훔쳐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모시면 가정의 축복을 준다는 기복 신앙입니다. 그동안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비록 어려서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왕입니다. 다윗왕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제거하고,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수리하고 재건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8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서기관 사반이 그 율법의 말씀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아왕은 그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이 때 왕은 옷을 찢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권위나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말씀 앞에 엎드리는 모습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회개하고, 그가 먼저 옷을 찢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깊이 성찰하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회개를 강조했을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천주교와 싸움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음을 알고도 자신을 쳐서 말씀 앞에 엎드려 주의 은혜를 구하는 그 삶속에 영적 어두움에 사로 잡혔던 시대를 주님의 영광으로 바꾸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함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울도 고전 9: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자기 개혁입니다.
요시야 왕이, 옷을 찢으며 남 유다가 지은 죄에 대해서 분개하며 신앙의 개혁을 더욱 단행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전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 가운데 있는지를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보니까 명확하게 자신들의 삶의 거짓과 죄악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개혁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하23: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우리가 그동안 말씀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개혁을 위해서
Ⅱ. 반드시 값비싼 희생의 댓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절 하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여기 ‘이루려 함’이라는 말은 애를 쓴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애를 씁니까? 말씀이 사라진 영적 암흑의 시기에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앞에서 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굳어진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듭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와 거짓된 평안을 주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로마 교황은 루터를 사제직을 파면하고 맙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에 나선 루터는 너무나도 고달픈 삶을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로마 천주교의 교리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대로 로마 천주교의 주장을 따랐다면 그는 평생 평탄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당대 엄청난 힘을 가진 천주교회의 신부였고,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평안하게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루터는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평안한 길을 거부하고 불편한 길을 택했습니다.
불편함을 넘어 생명에 위협을 받는 험난한 길이었기만 루터는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으로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란 위대한 용어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그것은 시대의 습관과 찌들고 병든 타성을 거스리는 불편한 말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이 루터뿐입니까? 루터보다 100여 년 전, 체코의 얀 후스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한 권위로 주장하며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탐욕을 비판하다 1414년 콘스탄츠 공회에 소환되어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화형에 처해졌다. 프랑스에서는 개혁 교리를 따르는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이 무자비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진리를 따르기 위해 혀가 잘린 채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화형당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지도자토마스 크랜머, 니콜라스 리들리, 휴 래티머는 당시 천주교의 온갖 핍박과 권력의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충성하기 위해 고통스런 화형을 선택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순교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용기를 갖고 사내답게 행동합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일 것이오… 하나님을 위해 불길이여, 내게로 오라!”며 그들의 삶을 아낌없이 주를 위해 드렸습니다. 개혁이란 위대한 용어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그것은 시대의 습관과 찌들고 병든 타성을 거스리는 불편한 일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끊임없이 개혁이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505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 개혁의 재발견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종교개혁은
Ⅲ. 신앙 본질의 회복인데 바로 오직 성경만이 해답입니다.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아왕의 아름다움은 말씀 앞에 서서 살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여기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율법을 따라 살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려분, 505년 전에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살던 1500년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입니다. 천주교는 “성경뿐 아니라 전통도 동등한 경건한 사랑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경외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에도 천주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둘 다 동등하게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길을 고수하게 되었고 지금도 이 입장은 변함이 없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까지 천주교와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성경 우선’(prima scriptura)이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냐의 차이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비진리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구원관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된 관심사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가 살던 당시 사람들의 주된 관심중에 하나는 구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럽에는 곳곳에서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돌아서, 유럽의 인구의 1/3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루터도 자신의 친한 친구가 병으로 죽는 것을 보았고, 자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죽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해서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선행을 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고, 공로가 충분히 쌓여야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은 있는데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쌓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정화과정을 거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따르는 것 같은데 자신들의 전통을 세워 진리인냥 포장한 것입니다. 이런 천주교의 구원관의 문제를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입니다. 사실 루터는 천주교의 잘못된 구원관 때문에 오랜 세월 큰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루터도 구원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서 수련도 했고,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지인 로마도 방문하고, 면죄부도 사봤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은 구원받을 만큼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사람이 성취할 수 없는 구원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루터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증오하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앞에 섰을 때 천주교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저 유명한 면죄부 사건입니다. 면죄부 사건이란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모금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알베르트라는 사람은 당시 이 면죄부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당시 유명한 웅변가 테첼을 고용했습니다. 그에게 신학박사의 학위를 주고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설교 아닌 웅변을 하게 하였고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속아서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게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사기꾼들의 쇼를 목격한 루터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많은 돈을 들여서 사기만 하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거짓말 설교를 듣고 모두가 줄을 서서 면죄부를 샀습니다. 이와 같은 악행을 목도한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가지 적어서 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직 성경!!’ 이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할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나침반을 보면 항상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지향하는 자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침판을 자세히 보면 항상 바늘 끝이 떨고 있습니다.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자석은 자기에게 지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늘이 떨리고 있다면 이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바늘 끝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그 나침반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나침판의 바늘 끝이 항상 북쪽을 향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으면 안 됩니다. 부지런히 읽고 배워서 주님의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성경의 길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시 119:105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영혼이 무디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나침판처럼 말씀에 민감하고 떨어야 합니다. 이 은혜 앞에 서면 우리의 삶이 마르지 아니하는 감사의 삶이 일어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 일어 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