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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그 아홉은 어디 있는가? (눅17:11-19)

작성자: 이춘구 | 등록일: 2022-11-20 | 조회: 211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병에 걸려도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 그렇게 크게 어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해도 나을 가망성이 없다면 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음을 위한 삶이지 삶을 위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은 보기에도 흉합니다. 코나 입술이 썩어들어가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손가락도 떨어져 나갑니다. 그래도 감각이 없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몹시 흉해서 편견과 격리 속에 고통과 아픔을 당하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시 무엇인가 부정한 사람,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그 결과로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동정받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동정은커녕 오히려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어야 합니다. 마을 어귀에 쫓겨 나가서 동굴에 살며, 가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병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 지긋지긋한 병에서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큰 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고침받은 후의 행동이 어떻습니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는데,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으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와서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나병에서 고침받은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아홉은 감사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나는 어떤 감사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Ⅰ. 우리는 감사의 불감증 시대에 살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감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죄인의 특성을 지적하는 데 그곳에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 언급됩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인의 특성이고,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인의 심성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세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이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11:17절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건조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피폐해지다 보니 사람들의 삶까지도 힘들어졌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삶에 힘들 때가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감각이 무디어질 때가 위기입니다. 내게 큰 어려움이 닥쳤다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이 풍요로워질 때가 더 큰 위기이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망하고 맙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셨습니까? 눈을 뜬 후에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보셨습니까? 힘들 일상이지만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셨습니까? 오늘도 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보셨습니까? 낙엽이 지는 가로수를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셨습니까? 계절의 변화 속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셨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탄식은
 
Ⅱ. 우리의 망각증세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짧습니다. 내가 베푼 것에 대해서는 길고도 질긴 기억력을 가지는 반면에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돌아서는 순간에 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병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체험한 후3일 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40년 동안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이 먹여 살리셨지만, 나중에는 만나밖에 없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언제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따집니다.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은혜받은 것이 적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지독한 망각증세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잊지 말 것에 대해 자주 명령합니다. 시103: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믿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더 큰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큰 것으로 부어주셔도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50:22-2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리석은 욕망의 껍질을 벗고 진실된 신앙인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감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을 하십니까?
 
Ⅲ.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문둥병자를 보세요. 15-16절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여기 그 중의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다는 이 말은. 얼마나 자신의 이 병 고침과 회복에 대해 기쁨이 넘쳤으면, 지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겠습니까? 자신을 평생 비침하게 만들었던 이 문둥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에 강사로 오신 정태기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치유 목회를 통해 한국 교회에 큰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정태기 목사님이 쓴 칼럼집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을 보면 정 목사님의 귀한 경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때 정 목사님이 신앙의 위기를 만난 적이 있어요. 도대체 기도가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기도원으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가방을 하나 들고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도착하던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낮 기도 모임이 있어서 거기에 참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리 발 버둥을 쳐도 기도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그를 파고드는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머리를 치고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갈을 수 있겠는지요?" 기도 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나이까?" 정 목사님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가 무슨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거기에는 60세가 넘은 흉측한 환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나병에 시달리다가 나았지만, 그 나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은 머리, 떨어져 나가서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버린 눈은 더 이상 사람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손목만 남은 손으로 박수까지 치며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때 정 목사님의 가슴속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을 뜨겁게 기도한 후에 목사님은 그 노인과 함께 나무 그늘에 앉았어요. 거기서 목사님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큰거에요?"
 
 노인이 한참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도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떠나버렸고,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 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야~! 할머니가 따라오셨군요?"하고 묻자,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예수님이 따라오신 거야." 목사님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 노인과 같이 지내면서 엄청난 변화를 받았고, 마음 속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기쁨이 출렁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부두에 나올 때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 목사님은 평안과 기쁨이 넘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한 사람의 나병환자가 감사를 표현한 그에게 주님은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신들이 받은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자기에게 돌아온 그 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한 명의 나병환자만 완전한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은 완전한 치유와 회복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달려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고,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천국입니까? 감사하는 자의 마음이 천국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 시간 한번 지난 세월 하나님이 내 생애 가운데 베풀어주신 은혜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까 인생의 모든 걸음걸음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한 사람의 나병환자가 감사를 표현한 그에게 주님은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신들이 받은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자기에게 돌아온 그 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한 명의 나병환자만 완전한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은 완전한 치유와 회복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달려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고,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천국입니까? 감사하는 자의 마음이 천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자신의 삶을 얽어매게 했던 문둥병으로부터 고침받았지만, 감사치 않은 사람은 아니더래도, 정말 한 문둥병 환자처럼 감격을 가지고 여기 섰나요? 오늘 이 자리는 잊었던 감사, 잃었던 감사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다윗도 지난날을 회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그는 이 모든 감격을 담아 시116:12절에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자신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 앞에 도대체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는가? 8절에 보면 그가 받은 은혜를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인생임을 알고 일상에 감사가 마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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