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유난히도 길어져만 가는 코로나로 인한 현실 앞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속이 복잡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삶이 힘들고, 사람이 무섭고, 인생이 뒤죽박죽일 때” 이 문제 앞에 어떤 생각으로 문제를 극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무리를 잘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끝맺음을 잘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마지막이 좋은 사람이 인생을 잘 산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로가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이 질문은 이 아침 모임 우리에게 주님께서 동일하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이 질문은 지금까지 그대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지금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앞으로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세월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이 자기 나이가 130인데, 그 세월이 험악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조상들과 달리 험악한 한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험악하다고 했는데,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원어성경의 ‘라아’(רע)라는 말을 험악하다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라아라는 말은 원래‘나쁘다’라는 뜻인데, 성경에서는 보다 폭넓게 쓰였습니다. 우선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 이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하여 영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이 말을 썼습니다. 야곱이 자기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자기가 한평생 큰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때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정신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해서 영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형의 분노를 피해 머나먼 하란의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라헬에 반해 그녀를 얻고자 7년을 종처럼 일했지만,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결혼을 했고, 라헬을 얻기 위해 또 7년을 죽도록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번번이 약속을 어기는 라반에게 속아 큰 곤욕을 치르다, 도망치듯 가족들을 데리고 겨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큰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겨우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로 에서와 화해를 하게 됐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땅에서 지체하다가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복수한다고 큰 사고를 치게 됐습니다. 겨우 하나님의 인도로 벧엘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이 때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큰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말한 그대로 험악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130년을 살아오는 동안 늘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몸이 고달팠고, 마음의 고통이 있었고, 그리고 영적으로도 편한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야곱이 말한 이 험악하다는 말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위기의 세월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코로나사태가 계속되어온 지난 3년 세월이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입된 이후 현재까지 대략 2500만이 확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인구 2명당 1명꼴로 확진되었고, 사망자도 1만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백신을 맞고 후유증으로 고생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됩니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과거 IMF때와 같이 경기가 심삼치 않습니다. 경제회복의 불투명, 정치는 끊임없는 반목과 질시 속에 왜 우리가 저 사람들을 뽑았가가 하는 후회감이 밀려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지금 이 사회가 진흙탕 속에 빠진 느낌입니다. 정치를 봐도 희망이 없고, 국제적인 상황을 봐도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거기에 다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세계화 되면서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절망감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우리 마음에 꽈리를 트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진짜 절망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랄 때 찾아옵니다. 그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밤하늘이 캄캄할지라도 그 속에서 흐릿한 별빛 하나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우리 안에 소망이 생겨납니다. 인생의 모든 줄이 다 끊어졌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한 줄만으로라도 노래하려 노력을 할 때 우리에게 소망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런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 때 어떤 상황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가운데서 가능을 바라보며 전 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온통 내 주변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의 근거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오늘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는 야곱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행동을 합니다.
Ⅱ. 바로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여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을 때, 그저 130살이라고만 해도 될 텐데 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을까요? 바로는 지금 초면입니다. 그리고 바로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을까요? 물론 본문이 직접 이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추정해 볼 뿐입니다. 한 가지 주목해 볼 표현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그리고 10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도대체 세계를 이끌어가는 바로에게 한 촌로가 자기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어떻게 이런 당당한 하나님의 복을 선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그 부분에 관해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1.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 28: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홀로 머나먼 하란으로 가던 중에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며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 정신없이 도망치듯 집을 떠났습니다.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험악한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험악한 세월 내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고비마다 놀라운 역사로 지켜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늘 평탄한 세월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겪을 때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 위기를 잘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 위기,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험악한 세월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이 험악한 세월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을 아름답게 쓰시기를 원하시는
2.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야카브“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 즉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이 이름 그대로 속이고, 남의 것을 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얍복강 가에 홀로 남게 하심으로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법들을 깨뜨리게 만드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삶을 지탱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내 인생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도록 얍복강 가로 야곱을 몰아오신 것입니다. 이 얍복강은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이 방법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것을 아시고 나를 철저히 분리 시킬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업이 어렵게 딘다든지, 건강의 어려움이 오든지, 인생의 관계가 뒤틀려질 때. 내 인생의 얍복강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연단하신는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부드러운 순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캐어낸 금이 순금으로 발견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금은 다른 이물질과 섞여 있는 상태에서 채굴됩니다. 그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섭씨 천도가 넘는 용광로에서 끓이고 끓여서 순금을 얻습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금이어야 진짜 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을 연단하는 한 제련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순금이 됐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자 제련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금을 자꾸 끓입니다. 끓이다 보면 불순물은 자꾸 올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불순물을 걷어냅니다. 걷어내고 걷어내면 맨 나중에 그 순금 속에 내 얼굴이 찬란하게 비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순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한 마음을 걷어내시고, 세상의 것을 욕망하는 거짓된 허상을 걷어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풀무불과 같은 용광로에서 끓이고 또 끓이십니다. 그렇게 끓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거짓된 자아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습관들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시련이라는 용광로가 그것을 자꾸만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짓된 자아와 세상의 썩어질 헛된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우리 안에서 걷혀지고 걷혀지면 결국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우리는 세상의 불순물들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련이라는 고난의 풀무에서 우리의 죄와 욕망과 세상의 거짓된 것들이 하나하나 정제되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작가라고 불리는C. S.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환란이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생을 향해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확성기이다. ’ 여러분,C. S.루이스가 왜 시련과 고난을 ‘확성기’라고 표현했을까요? 세상에 물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굳게 닫혀 있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세상의 소리에 귀가 가려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현대인들, 자신의 욕망의 소리에 매몰되어 그 욕망을 따라가느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환도뼈가 무너졌습니다. 그때 야곱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연단의 과정 속에 그는 비록 다리는 절었지만, 브니엘의 아침, 하나님의 얼굴을 믿음으로 보는 새 인생길로 당당히 일어 설 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나는 이 마지막 달에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해를 마감하며 코로나의 위기를 지나온 시절을 돌아볼 때 험악한 세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미 함께 해 오셨고, 또 이 험악한 세월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욱 굳게 주님 손을 붙잡고 견뎌내야 하겠습니다.
욥 23:10을 보면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같은 우리를 단련하셔서 이스라엘같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같이 쓸모없던 우리를 단련하신 뒤에 이스라엘같이 쓸모있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때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험악한 세월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