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이 주는 희망 사 7:14. 2022. 12/11
제가 아이티 사역을 마치고 이웃나라인 도미니카로 이동을 했습니다. 거기서 처음 알았던 것은 콜럼부스가 스페인을 떠나 미국을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도미니카의 지금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였습니다. 거기엔 콜롬부스의 발차취가 여기저기 깊게 묻어 있었습니다. 그가 국왕의 명을 받고 스페인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와 사나운 바람 그리고 거센 파도뿐이었습니다. 스페인을 떠난 지 여러 날이 돼도 정박할 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량과 물이 동이 나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선원들은 지금이라도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원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런데 콜럼부스는 태연하게 책만 읽고 있었습니다.
콜럼부스가 드디어 선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나침반이나 선박의 성능을 믿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꿈과 희망이다. 나는 지금 이사야서를 읽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콜럼부스는 다른 선원들과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목표를 향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희망이 망망한 바다와 거센 파도 넘어 저 신대륙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콜럼부스는 그 희망을 성경 안에서 찾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꿈을 꾸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꿈이 뭉게뭉게 피어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꿈을 주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주일을 맞습니다.
이 성경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여러분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성경을 붙잡고 희망의 항해를 하면 여러분 생애에 정말 멋진 경험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잡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붙잡고 나가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암울한 이런 위기의 시대에는 더더욱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희망을 찾기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줄 사람도 없고, 희망을 찾을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속에 희망의 약속을 찾아보십시오. 내 삶의 새로운 도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대하는 본문은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왕 때입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의 베가왕이 아람의 르신왕과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이 때 상황을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자칫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노예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해질녘 땅거미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여기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라는 말은 ‘불에 타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지팡이’라는 뜻입니다. 지팡이는 무기로 쓰이고 사나운 맹수가 덤벼들때에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동들이 맹수와 싸우기 위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연기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동맹군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튼튼하고 강한 지팡이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불에 타고 남은 부지깽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들로 인해 낙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쳐들어오는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앗수르 왕에게 ‘나는 당신의 신복이요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굴욕적인 자세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왕상 16:7-8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왕궁의 곳간에 있는 은금을 다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갖다 바쳤습니다. 왜 바쳤습니까? 결국 인간의 판단 속에 어떤 희망의 기대감 때문이 아닙니까? 그 일로 인해서 평안이 올줄 알았는데 성경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역대하 28:21절에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아하스 왕이 아무 유익도 없는 헛된 짓을 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상실감이 컸겠습니까?
유다의 왕과 백성들이 절망하고 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함께 본 14절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인간의 본질적인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근원적인 희망이요, 희망 위의 희망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마 1:23을 보면 이 약속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선포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당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희망의 징조가 이제 실현되어 희망 이상의 희망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적어도 예수님 오시기 700년전에 이 예언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그 희망의 징조가 실현된 사건이 바로 성탄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사건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인간이 겪고 있는 본질적인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선포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사건은 우리에게 희망 위의 희망, 가장 근원적인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증표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나라의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대적들이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시는데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두려워하며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권면하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생 사랑에 이끌려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 사람들’은 좁게는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사람들입니다. 그 제자 가운데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사랑 베푸시기를 멈추지 않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임마누엘로 내 인생에 다가오신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 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앞에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다 쏟으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 /span>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 때는 정말 어리석게도 잘못 알고 악을 저질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잘못 살던 인생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기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사도의 직책을 감당케 하는 이 황홀한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신 하나님 앞에 적당히 살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묻습니다. 왜 성탄이 우리에게 희망입니까?
Ⅱ. 성탄 -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여기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 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고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번 성탄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구유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신 이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오늘의 성탄절 자세는 어떠합니까? 여러분,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체험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이 기쁨을 담을 만한 구유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세속적인 환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경건하고 고상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들이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까? 그분이 막상 오실 때, 우리 인간들이 드린 것은 고작 구유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아들에게 우리 인류가 최초로 준 선물은 구유였으며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십자가였다고 했습니다.
Ⅲ. 이제 우리는 성탄의 희망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사야가 불신의 왕인 아하스에게도 희망의 복음을 증거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한나님의 자녀로 그 엄청난 십자가의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성탄의 희망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이 다가 아닙니다. 겨울 한파처럼 꼭꼭 얼어붙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론도 아니고 회의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막10:45절에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외된 현장에 가서 어려운 이웃에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성탄의 희망을 안고 믿음으로 사는 우리라면 이 희망의 꽃씨를 우리 주변에 나누면 어떨까요? 민들레꽃 하나에는 200개의 꽃씨가 있습니다. 민들레꽃 하나에서 그 200개의 꽃씨가 여러 곳에 흩어져 심겨지면 그 다음 해에는 200송이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민들레가 꽃이 피고나면 곧 꽃씨가 여무는데, 그 꽃씨가 꽃에 마냥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한 송이에 붙어 있는 약 200개의 그 꽃씨가 날려 다른 곳에 씨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듬해 그 200여개의 각 씨에서 싹이 나서 또 다른 아름다운 민들레 꽃들을 피우게 됩니다. 이 희망의 꽃씨를 나누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아닙니까?
제 메일에 아침마다 발송되는 ‘따뜻한 하루’라는 작은 글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글 하나가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참 긴 여운을 주는 내용입니다. 한 결혼을 한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부도를 맞게 되었고 그 이후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파출부로 일하셔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렇게 힘겹던 시간이 지나고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무료 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데 때로는 저희 아이를 데리고 갑니다. 식사하러 오는 사람 중에 노숙인도 있다 보니 혹여나 저희 아이에게 해가 될까 싶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명절날, 어머니는 당신이 봉사하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구석진 자리에 저를 앉히시고, 식판에 밥을 떠 주시면서 말했습니다. "거기가 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식사했던 자리다. 사업이 망하니까 친척도, 친구도 모두 네 아버지를 버렸는데 유일하게 네 아버지에게 따뜻한 식사를 줬던 곳이 여기야. 난 여기서 식사를 하는 이 사람들을 보면 너희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아프구나." 전 울컥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가끔 어머니를 따라서 자원봉사를 하러 나가곤 합니다. 처음부터 노숙인이었던 분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독거노인이었던 분도 없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 더욱 외로우신 분들...
우리가 근 15년 동안 동대문에 있는 등대교회에 섬김과 나눔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이 나눔은 보여주기식이 아닙니다. 내 욕구의 충족은 더더구나 압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신 성탄의 뜻입니다. 이 희망을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과 이웃에게 나누는 희망의 성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