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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 사람, 새 교회,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스승의 주일) 마9:35-10: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5-16 | 조회: 2566
중국 동부에 많이 서식하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모소는 6주 만에, 그러니까 한달 반 정도가 지나면 15m나 자라는 엄청난 성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나무를 비유하면서 ‘급작스러운 성장과 부흥’을 이야기할 때 많이 예화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씨를 심으면 바로 자라는 게 아니라 땅 속에서 4년의 긴 세월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 동안 땅 속에서는 뿌리를 수백㎡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퍼뜨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5년째 되는 해에는 놀랍게도 하루에 한 자 이상 자라기 시작해 6주 만에 15m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소는 6주일 동안 자란 게 아니라 5년 동안 자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도 하루 아침에 성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역시, 여기까지 올 때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이 자리에 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스승의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올해로 스승의 날이 29번째를 맞이했습니다. 과거에는 '스승'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감히 밟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만큼 무게가 있었고, 희생의 모습이 너무도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스승이라는 말이 사라져 갈 뿐만 아니라 한때는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에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무엇이라 해도 스승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의 삶 전체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당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알 수 있는 구절이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여기 주님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은,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다시 말하면 스승이 없었기에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깊은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리가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면서도 자기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실 때에 그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시거나, 귀찮게 여기시거나 정죄 한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실 때, 안타까와하시고 오히려 그들 때문에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참 된 목자, 참 된 스승은 죄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달고 욕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속에 죄로 인해 망가진 저주받은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참 된 생명이 들어가면, 얼마든지 살아나고 세워질 희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눅 6,39에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무리들을 고생시키고 기진하게 만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왜 소경입니까?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경 됨은, '잘못된 눈' 곧 '잘못된 시각'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고, 기진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로 그 다음 말씀, 마태복음 10,1-4절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언급된 12제자의 이름은, 그저 단순한 12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12 사람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시의 소경 같은 목자들, 소경 같은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던 '새로운 목자'라는 겁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말합니다. '새로운 일꾼'을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 12사도라는 겁니다. 이 제자들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심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 같이 세상 적으로 볼 때 어떤 기대가치가 없는 저들을 붙잡고 주님은 새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 속에 살던 이들을 택하셔서 3년 동안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시켜 이들을 가르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소위 홈스쿨링을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합신 교단에 있는 교역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부안에 있는 대명 콘도에서 3박 4일 동안 수련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족이 아이들까지 6명이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큰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고 나머지는 초등학교 아이가 2이고 6살 된 아이들입니다. 이들이 평일 날에도 거기에 올 수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학교 교육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전인적인 교육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오상규 목사님 역시 자신의 두 딸을 현지 학교로 보내지 않고 - 홈 스쿨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비록 짧은 3년 과정의 학교였지만, 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으셨습니다. 약한 저들을 끌어안으시고 사랑으로 대하셨고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배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실습하게 하시며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고생하고 방황하는 양들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추수할 곡식으로 보셨습니다. 정말 하나 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진액을 다 쏟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런 제자들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평가한지 아십니까? 행4:13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 성령받은 하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앞에 쟁쟁한 실력자들 명성이 높은 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아니! 저들은 본래 무식한 자들이 아니냐,”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제대로 배우지도 않는 저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도 막힘없이 외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권위가 드러납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제자들은 당시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소위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그들은 더 이상 옛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앞에 다듬어지고 세워진 그들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나아갈 때. 이 무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들의 관심의 초점이 바뀐 것입니다.
 
강인선(姜仁仙) 씨가 쓴 '하버드 졸업식 날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여러 내용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버드 대학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버드 대학의 힘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 온다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대안(代案)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버드 대학의 힘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교육 과정은 한 마디로 대안적 시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전 2: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한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시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 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이 기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은 너무나 황홀한 것이기에 이 사명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나실인처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12명은 예수님 살아 계실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얼마나 많이 책망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12명 가운데 10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나 같이 주님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이 자신들을 믿어주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 다 헌신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승의 주일을 맞아 참 이 땅에서 자라나는 다음세대에 대한 염려가 많은 것, 사실입니다. 교육 현장의 붕괴가 여기저기 들려오고 참 스승보다는 세련된 언어와 고급 지식을 나눠주는 선생들이 더 실용가치를 인정받는 서글픈 세상에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교육이든 예수님처럼 관심을 갖고 그 영혼을 끌어안고 나아갈 때 반드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무엇이라 해도 스승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의 삶 전체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강당에서 이야기 드렸지만, 저 역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더 이상 공부 할 수 없는 감수성 예민한 고3 시절,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 서 있는 사북에 있는 한 탄광촌으로 직장을 구해 내려갈 때입니다. 저의 담임이셨던 조성문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지금의 우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라"시며, 어린 나이에 탄광으로 가는 제자가 안쓰러웠던지 한참이나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제가 졸업한지 30년이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 당시 영등포 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단기집문" 이라는 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30년이 자난 세월 동안 숱한 제자들이 있었을 텐데 저를 기억하시고 글을 보내신 것입니다. '단기집문'이란 글의 뜻은 '비록 너의 처지가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용기를 갖고, 최선을 다하면, 네가 목표한 일에 집중하면, 그 고통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아픔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반드시 문이 열린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제가 탄광 생활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제자인 저에게 그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참 이 글을 받는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뭉쿨한지 한 동안 고3때의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더라구요.
 
그런데 선생님이 2010년도 초에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목회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당신이 교회 다니면서 감리교 권사로 있지만, 참된 목회자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고전 13장을 붓글씨로 쓰셔서 보내 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받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열등감 속에 학교생활을 방황하던 나에게 용기를 주시던 그 선생님이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승의 마음은 마치 자식처럼 제자가 가는 길이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길을 격려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이렇게 족자를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 앞에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로 그 삶이 보람과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학교에서 땀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또 경로대학이나, 실로암 대학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사회 각지에서 교사로서 교수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스승!! 그들은 해산의 수고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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