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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6-17)

작성자: 이춘구 | 등록일: 2022-12-19 | 조회: 183
  이번 주간에 내년 사역을 위해 교역자분들과 서천에 있는 수련원을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김대섭 목사님이 새로 부임한 채석포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하는데 꽃개탕 8인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역자 가운데 꽃게탕 킬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절반은 먹었나요? 그 많은 것을 먹고도 더 먹을 눈치였습니다. 그날 저는 음식을 먹는 모습 속에서 그렇게 큰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를 본 일이 있습니다. 서울시가 지난 11월 ‘서울 미식주간’을 앞두고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전국 1만 명을 대상으로 “나를 위로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코로나시대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음식’을 찾아보고자 물은 것입니다. 결과가 궁금하시죠? 10위가 닭발, 9위가 소고기, 8위가 케이크, 7위가 된장찌개, 6위가 라면, 5위가 삼계탕, 4위가 삼겹살, 3위가 김치찌개, 2위가 치킨, 그리고 대망의 1위가 떡볶이였습니다. 특히 떡볶이는 죽고 싶어도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묵, 순대, 그리고 튀김과 같이 한상 시켜서 먹으면 더 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문내용을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선 음식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야식을 즐기시는 분들, 그래서 체중이 점점 불어만 가는 분들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동안 음식을 절제 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음식을 통해서 남달리 많은 위로를 받는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정말 많은 위로가 필요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이 위로가 된다면 과연 얼마나 위로가 될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상의 스트레스, 크고 작은 상처들, 마음 속 깊은 곳에 담겨있는 슬픔... 행복한 입맛으로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그 입맛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이런 위로는 일시적일 뿐이 아닐까요?

음식을 통한 위로 뿐이 아닐 것입니다. 감동적인 시를 읽고 받는 위로, 일상을 떠나 여행하며 받는 위로, 심지어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으로부터 전해 받는 위로... 이 모든, 세상에서 얻는 위로들이 참 소중하고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 일시적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위로 말고 다른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요리문답의 제 1문항이 이렇습니다. “생사 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당신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요리문답이 답으로 가르치는 것이 이렇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치르시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살펴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서 위로를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저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기다리고 찾는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비록 세상의 위로가 없더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로 오늘의 아픔과 고난을 넉넉히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내 주셨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은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탄생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 뿐이고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하고, 우 리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연구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문학적인 재능이 탁월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글, 그리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글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묘사해 놓은 것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렇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신비한 일이라서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14절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창조자요, 생명이요, 빛이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 되어' 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사람이 되어' 라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하찮은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온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 받게 만들어 버린 뱀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저주하셨습니다. 창 3:14절에 ".…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흙은 저주받은 뱀에게 먹을 것으로 줄 정도로 천한 것입니다. 욥도 자식이 하루아침에 다 죽고, 재산이 날아가고, 아내가 도망가고, 몸마저 무서운 병에 걸리자 자신의 비참함을 이야기하면서 스무 번 이상이나 자신을 흙에 비유했습니다. 흙은 그만큼 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케노오(skenoo)' 인데, ‘장막을 친다. 텐트를 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함께 텐트를 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버림 받은 창녀와 같은 인간들의 틈 바구니에 오셔서 그 곳에 천막을 치고 함께 유숙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이 말씀, 로고스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 외에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Ⅱ.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18절은 이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그는 곧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나사렛 목수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영원부터 자존하신 하나님으로 믿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시골에 묻혀 날마다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이 권세 있는 가르침과 여러 가지 이적 기사로 인해 하루아침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비천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말꼬리를 물고늘어질 소지가 다분히 있는 말씀을 한마디하셨습니다. 요 8:56절에 "너희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쉽게 말해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려고 무척 애쓰고 사모하다가 드디어 자기를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600여 년 전에 세상을 살다 간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7). 그러자 예수님은 기가 막힌 대답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있느니라" (요 8:58). 그러자 유대인들은 격분해서 돌을 들어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감겨져, 흙으로 된 육신을 입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사형감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을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신성모독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자기를하나님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주 그를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주의해서 읽으면 죽인다는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육신을 입고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살벌한 긴장이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끝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자기의 아버지라는 주장을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양보를 했더라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중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로 오신 주님은
 
Ⅲ.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고 선언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무엇 때문에 오셨어요? 자, 그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뭐라고 하라? '예수라 하라'. 예수의 뜻이 뭡니까? 구원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구원. 그것을 위해 오신 거예요.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십자가로 가신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딜레마,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생은 성공하고도 마지막은 실패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오신 예수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간략하게 말씀합니다. 이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과 공의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한 사람도 멸망치 않게 하시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참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랑과 공의는 철로길과 같습니다. 만날 수 없는 평행선입니다.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해지는 복을 받게 되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원어로 “카리스”(cari")입니다. 이 말은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특성을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되게 하셔서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이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게 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절정이요 최고봉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은혜가 충만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성탄을 묵상하면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성탄을 통해 절정이 되어 나타났다는 점을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진리가 충만하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 성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계속 그 언약을 지켜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을 진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충만하다는 말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완성되다”, “완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또한 반드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오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 성탄 사건을 통해 그 언약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약속에 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 가운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 무려 350여회나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약속도 수십 번이 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약속이 하나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에 말씀드렸지만, 김대섭 목사가 새로 간 채석포교회는 우리 교회가 14년 전에 기름 유출로 바다가 폐허가 되었을 때 다녀 온 곳입니다. 그당시 그곳 어민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었습니까? 우리 교회가 작은 사랑의 헌금과 드렸고 또 현장에 가서 하루 종일 기름에 쩔은 바위 하나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의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봅니다. 채석포 교회에서 그 바닷가를 가서 그 현장을 보니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14년전에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해변을 부산에서, 강원도에서, 서울에서,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로 꾸역꾸역 해안가를 메꾸고 있었습니다. 새까맣게 덮인 태안반도에 뒤덮인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봉사리는 이른 아침부터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 때문에 주변 가게마다 우리 가게는 “지금부터 무기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라ㅡ333 비통한 프랑카드도 이곳 저것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섬김의 향기가 죽은 바다를 살린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 마져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거절했지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마신 자들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진리 앞에 섰다면,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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