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자매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Ⅰ. 그 이름 속에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올텐데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명공학이 발달을 해도 죄로부터 온 고통과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거둬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생명공학이 발달해서 120년까지 산다고 하고, 실제로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3세까지 살았습니다. 최근의 뉴스위크지를 보면 150세까지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얼마 있지 않아서 암이 정복되고 우리의 신체 장기들이 낡으면 갈아 끼우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죄로부터 온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요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대로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Ⅱ. 그 이름 속에는 임마누엘이라는 보석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천사는 요셉에게 메시아로 오실 그분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계시하십니다.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가 메시아의 구원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임마누엘은 동행의 역할을 나타내는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두려움을 이기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히13:5의 말씀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과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never’입니다. '결코'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던 일들도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한 금년에 내게 가장 좋았던 일들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혹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금년 한 해 내게 가장 좋았던 일을 꼽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37:24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백성이 인생길을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는데 완전히 엎드러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넘어질 때 하나님께서 손으로 붙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싱 경기를 보면 선수가 넘어지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운’이고, 다른 하나는 KO입니다. 다운은 미끄러져 넘어지는 슬립다운이 있고, 펀치를 맞아서 넘어지는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운당한 선수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할 수 있다고 판단돼서 경기가 재개됩니다. 그러나 KO를 당한 선수는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난다고 해도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경기가 바로 종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면서 다운 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KO 당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도 넘어집니다. 때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 /span>계획하고 추진해 오던 일들이 무산되고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울고 있는 노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노인이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모습을 연필로 그렸습니다. 마치 우는 소리가 그림 밖에서도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혹시 금년 한 해 동안 이 노인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너무 힘이 들어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그저 통곡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 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그림의 노인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엎드러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자칫 미끄러져 넘어졌을지라도 또는 펀치를 맞고 넘어졌을지라도 KO로 경기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왜 포기합니까? 왜 신앙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십니까? 그 이름, 예수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 주일이고 송년 주일이기도 합니다. 올해 주일 예배로는 마지막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제 마치 달력을 다 넘기고 새 달력을 달듯이 2022년을 역사 저 너머로 넘기고 새해 2023년을 맞을 시점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신 그 이름, 예수 주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를 붙잡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이름, 예수 그 주님의 손을 붙잡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