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2023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새롭게 맞이한 2023년 올 한 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때론 내가 저지른 실수나 죄 때문에 위기를 겪습니다. 이때 후회하기도 하고, 자책도 합니다. 때론 나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이때 억울해 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문제는 스스로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해 갈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위기가 찾아왔을 때 두려워하고, 위기를 겪으면서 좌절합니다. 그러면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차 대전 때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헬리 그래머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들이 한 밤중에 목사관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사님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기투합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자”
그래서 이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저항운동 조직이 세워졌고, 이 조직이 나라를 되찾는 일에 앞장서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위기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위기대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우리만의 위기대처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2023년도 표어를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표어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이 표어를 하게 된 동기는 코로나로 인해 3년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한 경제가 급속도로 침체되는 상황 가운데 모두가 힘들어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을 보았습니다. 한 조사 기관에서는 한국교회 가운데 1만이 넘는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아예 신자 가운데 소위 가나안 교인이 신자인데 교회를 안나가는 사람들이 200만이 넘는다는 이런 이야기 앞에 이것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새해를 선물로 받았는데 목사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을 무엇보다 회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를 모델로 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 안디옥에서 지금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본래 어떤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26절에 보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삶에 참된 모습을 보고 붙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Ⅰ. 그리스도인이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가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다닌다면 그게 오늘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일터가 교회이고, 주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이렇게 미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은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전 군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군에 갓 입대한 시절 참 많이 맞았습니다. 당시 군에 군기가 셌고 구타가 많던 시절이지만 심할 정도로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만 그렇게 많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때리는 고참에게 때리는 이유라도 알고 맞자고 했습니다. 그 고참이 하는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기분 나빠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왜 기분 나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식사 때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먹었고, 자주 열리는 부대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군에서 제공되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이 고참이 볼 때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 믿는 티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히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요15: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보세요.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렇게 영적인 어둠이 짙은 세상 속으로 흩어집니다. 그리고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복음을 전하려 할 때 보이지 않게 또는 대놓고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참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하는 일터는 세상 한 복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영적 어둠의 무거운 짓눌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할 때 미움을 받게 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구지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이 신앙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주변사람들이 다 아는데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해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직장 오너나 상사가 불신자여서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까 두려워해서라는 것입니다. 약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합니다.
Ⅱ. 안디옥 교회의 배경
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19절에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이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이 피하여 들어온 지역이 바로 안디옥입니다. 이분들은 자의가 아닌 핍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가까스로 모이긴 했지만,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피난민으로 모이다 보니 교회의 구성원이 어떠하겠습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구성원들의 연령을 보십시오.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귀족도 있었고, 심지어 노예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성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종의 다양성과 신분의 다양성, 그리고 나이차이도 많은 사람들이었고 이들 모두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멋지게 하나로 살아갑니다. 주변에 생명의 향기를 쏟아내며 삽니다.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기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괄시하던 그들의 입에서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야’하고 인정을 해준 것입니까?
Ⅲ.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첫 구절 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더니” 아니 믿음의 박해로 그들이 흩어져 안디옥까지 오게 되었다면 이제 거기서는 조용히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박해로 흩어지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의 사랑 앞에 나 같은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신 그 사랑을 깨닫는 자입니다. 힘이 들고 시험이 오고 고난이 뼈속까지 스며들어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약속을 붙잡고 사는 자들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16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 잠시 고향 글래스고우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이 때 글래스고우 대학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우선 리빙스턴의 범상치 않은 첫인상에 압도됐습니다. 그때 그의 팔 하나는 사자의 공격을 받아 이미 쓸 수 없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스물일곱 번 열대병을 앓은 그의 몸에는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또한 노예상들과 그를 방해하던 수많은 적들과 싸우면서 고달프게 살아온 그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리고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경의로운 눈빛으로 리빙스턴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그네의 삶이 가져다 준 외로움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나를 붙들어준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약속이었습니다. 가장 고결한 영광을 지닌 귀하신 분의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바로 그 약속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약속 위에 굳건히 서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리빙스턴처럼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위기 속에서는 더더욱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약속이 위기 속의 리빙스턴을 지켜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켜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약속 붙들고 은혜 앞에 이제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백합을 아시죠? 강대상에 백합을 꽃꽂이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백합화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 모양보다는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는 가시에 찔리는 고난을 통해서 아름답게 풍겨납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북풍과 남풍이라는 더욱 큰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에 더욱 진한 향기로 세상을 향기롭게 만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평안한 삶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련과 같은 깊은 고통을 통해서 진정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경제학자나 사업가들은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욱 어렵다는 우려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당당히 일어섭니다.
일전에 이해할 수 없는 뉴스를 본 일이 있습니다. 50억 재산가가 노숙을 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부모로부터 토지보상금 50억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은행에 넣어두어 매달 1000만원씩 이자를 받고 있는 사람인데, 인천, 서울, 천안을 떠돌며 노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도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을 쓰지 못하고 영적인 고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세상이라는 가시에 찔릴 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향기처럼 드러내라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 자아라는 단단한 껍질이 깨어질 때에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가시에 찔려 내가 아파할 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기로 말입니다. 아름다운 향기로 말입니다. 나의 냄새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희망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 62:5절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그리고 시 146:5를 보면 시인은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이 고난 한 복판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며 믿음으로 세계 선교의 물고를 텄던 안디옥 교회 얼마나 근사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희망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서 진정한 복을 누립니다. 여러분이 이 위기의 시대에 오직 하나님에게서 참된 희망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상, 메마른 세상에 백합화가 만발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가길 원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시길 원할까요? 당연히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백합화를 피워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메마르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기도함으로, 그리고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교회에 주신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