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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그리스도인②(행11:19-2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1-08 | 조회: 423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를 시원케 해준 손홍민 선수를 잘 알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는 한국축구의 자랑이요, 보물과 같은 선수입니다. 손 선수와 함께 뛰어본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 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손흥민은 클래스가 다른 선수입니다.” 자기들은 우리나라 최고 클래스의 선수들이지만, 손 선수는 세계 최고 클래스의 선수 즉 월드클래스의 선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 선수 자신은 “저는 월드클래스가 되려고 노력하는 선수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손흥민 선수는 축구 기량만이 아니라, 그 인격도 클래스가 다른 진정한 월드클래스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각 분야에 이렇게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재능이나 기량의 클래스가 다르고, 삶이나 인격의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분야에서도 그렇습니다.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클래스가 다르고, 삶의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이 안디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은 수리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지금은 터키 영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디옥은 중요한 상업도시이었으며 당시 이미 인구가 50만에 달한 곳으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스테반의 순교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성도들이 수리아 안디옥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안디옥은 새로운 선교의 중심도시가 된 것입니다. 순교와 박해는 복음을 저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의 중심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하면 가장 보편적 인식은 그냥 교회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1. 말씀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는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 도달한 이곳에서 안디옥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흥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바나바는 함께 섬길 동역자를 찾습니다. 25-26절을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동안은 제자들, 성도, 형제들 이렇게 불리우던 이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르쳤다’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안디옥 교회의 이 변화는 바로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품에 안긴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은혜의 교회 박정식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천에 창녀들과 극빈자들이 모여 있는 학익동에다 아내와 함께 천막 교회를 치고 이곳 주민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치유 사역이 우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병자도 낫고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기와 반목, 그리고 분열의 뼈아픈 경험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사 복음서를 붙잡고 묵상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말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가르침”이라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쳤다."는 단어였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케"라는 말인데 말씀을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그래서 나중에 ‘가르쳤다’에만 동그라미를 계속 치면서 읽었답니다. '가르쳤다'가 '기적과 이적'보다 아홉 배가 더 많았습니다. 9:1의 빈도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조차도 기적과 이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왜 사람이 안 변하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새롭게 목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하려다가‘아니구나 ’다시한번 해봐야겠다는 불꽃이 가슴에 와닿자 그는 달동네에서 미친 듯이 제자훈련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교회가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교회로 많은 교회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안디옥 교회의 제자훈련은 단지 고급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피를 토하듯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 가르침을 받은 그 당시

 

2. 다양한 구성원입니다.

13: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구성원들의 연령을 보십시오.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던 사람입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왕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젖동생입니다. 대단한 귀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즉 흑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흑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네가 북아프리카지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한 유대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 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성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종의 다양합니다. 신분이 다 달라요. 그리고 나이 차이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순종의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핍박의 현장에서 하나님 주시는 비전으로 자신들을 세우시고 불러주신 사명을 깨 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하는 하나됨을 통하여 고난도, 핍박도 넉넉히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을 보았던 당시 안디옥 도시의 살던 사람들은 이 교인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을 만납니다.

 

Ⅲ. 바나바가 주는 삶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고난의 와중에서도 본문은 안디옥 공동체의 지도자 바나바를 소개하며 제일 먼저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하지 않습니까? 거짓이 없고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바나바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행전4:36에 나옵니다. 이 착한 지도자 바나바의 삶을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여기서 ‘위로’라는 말이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와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령을 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 보시면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헌금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속에 믿는 삶들이 얼마나 궁핍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때 바나바는 교인가운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헌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헌금을 받아들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온 교인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한사람의 헌신은 온 교회에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바나바가 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본문 24절은 이런 지도자의 영향을 받으며 안디옥 교회에는 큰 무리가 더해지는 부흥이 일어났고 이런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예로운 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는 얼마나 멋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얼마나 근사한 사람입니까? 그가 위로의 아들이란 별명도 당시 사도들이 붙여 준 것입니다. 별명으로 얻은 바나바라는 이름처럼 이웃들을 만날 때마다 격려하고 위로하던 사람입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필요로 할 때 서슴치 않고 자기 지갑을 열던 사람입니다, 젊은 지도자 사울을 믿어주고 격려하고 세워 주었던 사람입니다, 누구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던 실패자 마가를 데려다 그를 치유하며 격려합니다. 마침내 감옥에 갇힌 바울의 동역자로, 마가복음의 저자로 세웠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바나바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때 자신의 리더십을 바울에게 물려 줍니다. 바나바가 바울보다 연장자입니다. 신앙경력이나 사역경력이 더 길고 풍부합니다. 무엇보다 바나바가 바울을 이끌어주었고,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바울을 앞장세웁니다.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따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나바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클래스가 다른 사람입니다. 때가 차면 미련 없이 물러설 줄 알던 사람-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2023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에게 2023년이 어떤 해이기를 원하십니까? 아픔이 있는 분들에게는 치유의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경제적으로 쪼달리고 힘들었던 분들에게는 풍요로움의 은혜가 가득한 해 되길 기도합니다. 아직도 풀려지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문제가 풀려지고 형통한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2023년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는 클래스가 다른 사람으로 세워지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속에 병든 시대를 치유하고 희망을 준 안디옥 교회 – 그 힘의 원동력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든 시대에 어떻게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하고 마치려 합니다. 21절입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여기 ‘주의 손을 칼빈은 성령이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이 거친 바다를 항해한 내 인생의 노를 붙잡고 우리를 대신하여 힘차게 노를 저어 주십니다. 영의 눈을 떠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인생의 노를 대신 붙잡으시고 힘차게 나와 함께 노를 저으시는 하나님, 나를 대신해 노를 저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인자한 모습으로 웃으시며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41:13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의 오른손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주고 동행하니까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그들은 더 이상 염려와 두려움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럽분, 초대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합니다. 가난합니다. 그들의 삶에 무슨 인간적인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그들이 보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한 생을 주님의 복음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을 통해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로마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세계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삶을 살자 염려가 다 날라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니 이것을 좀 자랑하고 싶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테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과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티테디오스 ‘안두익’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티테디오스 자기 이름 한번 불러 보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힘들고 지쳐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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