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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회 – 그리스도인③(행13:1-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1-15 | 조회: 280
 여러분도 한번쯤은 읽거나 만지작거렸을 일본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목에 있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언가 생각하게 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서 끊임없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로마 제국을 그토록 강대하게 만들었는가?” 지성적인 면에서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했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뒤떨어졌으며, 경제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쳐졌던 로마인들이 오래도록 번영을 누리며 세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면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로마 시민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원칙을 지키며, 로마 시민 됨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한 정신이 바로 로마제국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최강국의 시민이었던 로마인들은 이 ‘로마 시민’이라는 자존심이 대단해서 로마인 외의 민족은 하등민족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많은 특권을 당연하게 여겼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로마 시민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군인생활을 하거나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시민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나는 천국 시민이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 크리스천으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정체성에 대한 자존심이 성도의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자존심을 피와 같이 그의 영혼 전체에 흘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장에 보면, 고난의 한 복판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세상에 영적 물꼬를 튼 세계 변화를 주도한 엄청난 사역을 감당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모인 이 교회는

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2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 ‘주를 섬겨'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주를 예배할 때에' 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한번 잘 드리고 나면 내 영혼 가운데 있던, 어두움의 그림자, 패배감이 사라지고 승리감이 충만하여 내 속에 있던 죽음의 세력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롬12: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 '권하노니' 란 이 말은 어떤 슬랭 영어에서는 '팔을 비틀어서라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기 게을러 하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에 팔을 붙들어서라도 다리를 묶어서라도 다리를 꺾어서라도 예배하는 자리에서 은혜 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만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와의 만남,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이 예배의 감격을 대해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습니다. 저처럼 어릴 때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바닷가가 주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추억들이 많습니다.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다 빠집니다. 옛날만해도 바다 밑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요즘 바닷가는 너무나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다 빠져나가면 오물 쓰레기들이 돌아다니고, 죽은 성게, 중독되어 이상하게 죽은 물고기 등 지저분합니다. 그러다가 밀물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 점점 물이 많아지면서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나중에는 물이 해안가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썰물 때 보았던 바다 밑에 있던 온통 더러운 것들이 싹없어집니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풍요로운 물결과 파도소리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배라는 의식을 행함으로 밀물과도 같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에 나올 때만 해도 세상에서 고생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마음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 상처도 많이 입고, 여러 가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범한 죄로 영혼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잡동사니를 마음에 안고 그대로 예배에 나옵니다. 대부분 예배드리러 나오면 "주님, 지난 한 주간 잘 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고 회개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썰물 때 물이 빠져 나간 후의 더러운 바닷가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면, 하늘로부터 밀물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밀물이 우리 마음을 덮고는 그 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쓸어내 버립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근심걱정이 조용히 물러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은혜가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전심을 다하여 예배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한다고 해도 예배가 예배답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 주일 동안 예배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며 주일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면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스펄젼도 자주 교인들에게 외쳤습니다. ’설교가 들립니까? 그러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당시 새 시대를 향해 변화를 가져온 안디옥 교회는,


Ⅱ. 희생적인 헌신이 있는 교회입니다.(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여기 ‘보낸다’는 말은 선교로 세상에 복음의 생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안디옥의 두 지도자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앞가림도 못하는 이 안디옥 교회가 기도하는 가운데 이들을 파송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조치를 한 것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행전1:4절이나 눅24:4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전1:8절에 의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려 하였고 현재에 만족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다 낙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한 재림 주를 맞이하여 거기서 즐기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이방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이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는 이 13장에서 마지막 부분인 28장까지는 바로 세상에 보내진 자들의 선교 현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굶기도 하고 심지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 꿈틀거리는 복음의 생수는 부패하고 타락한 저들의 심령에 생명의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 안디옥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은 바울을 보세요. 사도행전 24장 5절에 더 둘로라는 변호사가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기에서 염병이란 당시 무섭게 유행하던 전염병 페스트를 의미하지만, 예수에게 미쳤던 바울의 힘, 복음의 능력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페스트 병이 무서운 세력으로 전염되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안디옥으로, 다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에까지 이르렀고, 나중에는 당시 세계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복음은 로마제국이 잘 닦아 놓은 도로를 따라, 유럽 각지로 퍼져갔고 바다 건너인 영국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우리 한국으로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예수님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미친 자의 태도가 아닙니까?

 얼마 전에 눈길을 끈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픔 없이 성공 없다’, ‘1년만 미쳐라’는 광고입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앞만 보고 나가라는 희망을 주는 광고입니다. 최근에 ‘미쳐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미쳐라’, ‘건강에 미쳐라’, ‘자기계발에 미쳐라’, ‘20대, 인테크에 미쳐라’, ‘서른 살, 만남에 미쳐라’등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어떤 일에 미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랑에 미친 사람도 있고,도박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업에 미친 사람도 있고, 공부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친 자가 대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구청에서 신년 하례식에 순서를 맡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구청장님이 우리 교회가 있는 이 자양 4동이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다 하면서 23년도 프로젝트를 내놓았는데 표어가 ‘신속 통합기획’이라는 슬로건으로 이 자양 4동을 신속하게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이 구청장이 행정에 미쳐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바뀝니다. 이제 우리도 주의 뜻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은 헌신 없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여기 하나님 나라의 물꼬를 튼 안디옥 교회는

Ⅲ. 가슴이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1절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오늘 여기 다섯명의 사람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양합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안디옥교회에는 백인이 있었고, 흑인이 있었고, 황인종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있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지위가 높은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지위가 상당히 낮은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지도자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안디옥 출신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단 한 사람도 안디옥 출신이 끼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 외국인입니다. 다 다른 지방에서 이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디옥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대의 물꼬를 트고 세계에 복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다섯 사람들이 가진 성향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들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하고 공동체의 합의된 의견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고난과 환란이 뼈속까지 파고드는 시대입니다. 이 안디옥에 이방사람들의 곱지 않는 시선과 핍박 속에서도 안디옥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입니까? 어떤 영향력을 사회에 끼친 사람들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즐은 그들 삶속에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 앞에 서로 함께 격려하면 일으켜 주며 고난을 이겨나갔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의 명을 받은 독일군들은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을 받은 독일군 가운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을 학살한 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독일군들도 많았습니다. 독일 군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되어있는 포로수용소에 화장실을 하나만 남기고 없앴습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섰습니다. 급한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아무데나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수용소 곳곳은 배설물로 넘쳐났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배설물과 뒤엉켜 살아가면서 짐승처럼 변해갔습니다. 하나씩 둘씩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독일군들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을 죽이면서 한결 양심의 가책이 덜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도 과거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유대인이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부질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4시 반에 유대인 포로들에게 따뜻한 물 한 컵씩이 배급되었습니다. 이 때 일부 유대인들은 물을 남겨서 이를 닦았고, 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독일군 눈에 이들은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이들을 함부로 학살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을 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격의 고상함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내 스스로도 인간다운 삶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남들에게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로부터도 그리스도인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보세요. 1-3절에 보면 ‘금식했다. 그리고 또 금식하며 기도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성도들은 자신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이 참된 소망임을 뼈속까지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해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월들을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다고 약속합니다. 사41:10절에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이 말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이 부르고 택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는 한 염려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이처럼 든든한 응원군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계속 붙잡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교회 안에 생수가 흐르듯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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