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구력으로 2023년도의 새해를 맞는 설날 아침입니다. 우리나라는 설날이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설날에 대해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날의 설이란 의미는 '낯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우리는 다시한번 한해의 첫발을 내딛는 이 시간, 특히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향을 방문하 친지를 만나서 명절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중국은 설날을 춘절이라 부르는데 21억명이 고향을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 이전에 4000만명이 넘는 분들이 고향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되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새터민들이 있습니다. 그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임진각을 찾아 눈물을 흘립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향길을 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고향으로 가긴 가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비틀거리며 힘든 걸음으로 겨우 고향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인생의 흉년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압이라는 이방 땅에 이민 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1절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당시 가장 암울한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가정이 살던 시대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산 영적으로 어두움이 깔린 시대입니다. 더구나 기근으로 인해 흉년까지 들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Ⅰ.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오는가?
2절에 보면 이 가정의 남편은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입니다. 엘리멜렉 -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뵈도 믿음이 좋고 경건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경건한 남편, 기쁘고 사랑스런 아내가 믿음의 땅인 베들레헴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그곳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이름 자체도 ‘떡집’, 오늘날로 말하면 ‘빵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 어떻게 흉년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살다 보면 도저히 흉년이 일어나면 안 되는 곳에 흉년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 저런 아픔이 찾아올 수 있을까?’, ‘예수를 잘 믿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의구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생의 흉년이 몰아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왜 오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장 앞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지는 그 판단 여하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이 흉년 앞에 고향을 떠나 모압이라는 곳으로 이주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흉년을 피해 찾았던 모압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도 목축도 잘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가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서 온 그들은 10년 만에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렸습니다. 5절에 보면 “말룐과 기룐 두 사람이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런데 이사를 간 모압 땅에서도 그 가족에게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모압 땅에 거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가족은 어머니와 두 아들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남은 두 아들도 그 땅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결혼을 했는데, 그 아들들마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이라는 이름은 ‘병약하다, 쇠약하다’는 뜻입니다. 기룐이라는 이름 역시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환자, 비쩍 마른 놈’ 그렇게 짓고 싶었겠습니까? 어쩌면 두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허약한 두 아들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 마져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기구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두 며느리뿐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인생이 되어야 할 나오미에게 기쁨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던 고향마져 등졌지만, 10년 만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서 가졌던 두려움, 낯선 땅에서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마져 자신의 곁을 떠났을 느꼈을 절망과 통곡, 그 모든 것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때 나오미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절규했을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왔지만, 아버지 중풍에 젊은 시절 고통속에 떠나면서 남매만 덩그런히 남겨두고 빚만 남기고 간 그 자리에 어머니의 가여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미는 남겨진 고통의 현실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Ⅱ.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6절)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기 ‘그 소식을 듣고’ - 무슨 소식입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 땅이 계속 흉년으로 고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 희망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해석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주요한 것은 들려진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그치고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인간적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여인들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털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누워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사자성어로 고쳐보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기립발광”이라고 했답니다.
셋째 “돌아가다” -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단어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떠남과 향함(Turn from, Turn to)입니다. 지금의 잘못된 모습이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죄악, 하나님을 멀리 떠나 즐기던 옛 습관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잘못된 것을 떠나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면 결국 옛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떠남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구체적인 노력이 요구됩니다.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1장 전체에서 ‘너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느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제 7절을 보면 “있던 곳에서 나오고” “있던 곳!” 미운정 고운정이 배어 있는 곳 모압땅입니다. 남편과 자식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함께 따라 나서는 두 자부는 바로 이 모압땅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내 온갖 정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길거리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까지 정들지 않은 것이 없는 땅입니다.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저자는 “있던 곳에서 나왔다”는 한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엄청난 결단과 각오입니다. 여기 고향을 향해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는 반응에
Ⅲ. 결단하는 룻을 보십시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두 아들의 미망인인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모압땅을 떠나지 않고 흐느껴 웁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여기 ‘붙좇았더라’는 말씀을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해가 가는 이야기입니까? 망한 가정입니다. 함께가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룻의 결단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16-17절에 보면 뭐라고 나옵니까?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고부간의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눈물겨운 은혜의 향기가 담겨있습니다. 시모 나오미는 여기 남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
여기에 보면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모는 빈털터리입니다. 그런데 붙들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끼? 룻은 그동안 나오미의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이방 모압까지 와서 쫄땅 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오미의 믿음이 회복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고난의 한 복판에 있었지만, 오히려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그 믿음을 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그 환경이었지만,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시어머니가 붙들고 있는 이 신앙, 이 믿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것은 소득없는 무모한 일인지도 압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놓치지 않는 그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룻은 자기에게는 갖가지 축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자와 동행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분명 이 자리는 그의 삶의 실패처럼 느끼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를 보십시오. 아무리 앞뒤를 돌아보아도 자기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그 대신에 채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8절입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이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는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은 비록 우리가 깨지기 쉬운 존재일찌라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나의 삶을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드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떠나온 고향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회복이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이란 병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드려움 때문입니다. 육신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습니다. 그는 당시 계약 결혼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문제를 사회에 던지고 그 유명한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 계약 결혼을 함으로 전통적인 결혼관을 무너뜨렸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그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죽어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제임스 그레이‘라는 유명한 신학 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설날 때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또 가요. 고생 고생하면서 막상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온 기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국에 대한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 만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방황하며 나오미의 가정처럼 세상에 파묻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아픔과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길, 승리의 길, 천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