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사태를 맞아서 마스크는 필수품목이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챙기지 못했을 때,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쓰던 마스크를 내일 30일을 기해서 벗는다고 합니다. 참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늘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잠잘 때 벗습니다. 그리고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만 잠깐 벗었다가 바로 다시 쓰게 됩니다. 저는 마스크를 쓰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쓰게 하셨을까? 하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많이 하고 사니까 입 좀 다물고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인생에서 언어생활이 2/3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일들이 말로 이뤄집니다. 사업해도 공부를 해도 어떤 일을 해도 다 말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부분은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합니다. 의미 없는 말에서부터 생각 없이 하는 말은 얼마나 많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합니다. 그래서 “언어생활에서 승리하면 인생에서 승리하고, 언어생활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 실패한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한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서 좀 더 성숙해지고 싶고, 좀 더 주님 닮은 모습으로 살고 싶고, 더 나아가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고 싶은 심정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사람의 품격,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성숙함을 측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태권도 실력이나 바둑 실력은 심사해서 단증을 부여하면 되는데, 인격과 믿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데 측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다 하나님 내게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고 싶고 성화의 삶을 향해 좀 더 새로워지고 싶은 갈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언어생활의 성숙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말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언어의 품격이 무엇인지 잠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여기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 하고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는 이 표현은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리는 말은 누군가가 그 말을 으면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기고, 살 희망이 솟구치는 그런 말입니다. 대신 죽이는 말은 누군가가 그 말을 들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절망의 깊은 늪에 빠져들게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말, 살리는 말을 하려면, 약3:2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굴레 씌운다”는 것은 ‘통제한다, 다스린다,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을 조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는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엄청난 위기의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도 너무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박해했던 사울을 향해서도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 가는 자기를 향해서 먼지를 떨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향해서조차도 그는 전혀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다윗의 심복인 아비새라는 신하가 저 시므이의 멱을 따겠다고 말하니까 “가만두어라.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가 내게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였지만, 그의 눈앞에 충성하던 신하들이 죽어갑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아예 다윗을 매장하려 합니다. 그때 얼마나 분노와 상실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시141:2절에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고통의 상황 앞에 절제력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날 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분노로 쏟아낸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는 치명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성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이 내 뜻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지, 이 말이 내가 바라는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지, 혹시 이 말이 누군가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혹시 이 말이 공동체에 나쁜 파문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입니다. 각종 공해로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습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 협박, 흉보고 헐뜯는 말, 우리의 마음과 삶은 온갖 오염물질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언어의 폭력으로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고 식’의 폭력성 글을 보면, 섬뜩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언어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품격과 영향이 있는지 아십니까?
Ⅱ. 우리의 언어가 인생을 변화시키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13, 14절)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채찍이 있다’ 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 입술에 지혜를 가지고 살지만, 지혜가 없는 자는 채찍이 있다는 말은 그 언어의 어리석음을 그 입에서 올바르고 선한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교정을 해서라도 바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4절에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이 말의 뜻은 지혜를 가지고 사는 자는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어떤 상황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치명적인 곤경에 빠뜨리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말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촌철살인’을 들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치의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주 짧고 간결한 말로 핵심을 찌르거나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이 촌철살인의 고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을 받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 속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①.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 사랑과 용서를 외쳐 오셨던 주님께서 스스로 전한 말씀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②. 돌로 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 여기 돌로 치라는 말씀은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지 않는 공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단서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위기를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지혜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치라’는 말입니까? ‘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죽이라는 말입니까? 살려주라는 말입니까? ’ 분명히 치라고 했으니까 죽이라는 말 같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했으니 아무도 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살려주려는 예수님의 깊은 뜻과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또한 죄를 심판하려고 살기가 등등해서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에게 남을 정죄하기에 앞서서 먼저 너 자신의 죄가 얼마나 추하고 악한 것인지를 깨닫고 자숙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죄가 전혀 없이 정결하신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자격과 권세가 있으시지만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보다는 용서하여 줄 테니 다시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돌을 들고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모두 한둘씩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돌 맞아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촌철살인입니다. 다름 아닌 지혜로운 말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지혜로운 말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지혜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언어생활이 2023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약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기 무엇을 구하라는 것입니까? “지혜”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란 의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사건을 분별하고 해결할 수 있는 통찰력”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진 지혜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지혜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때때로 어리석음을 범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린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쥐었다고 하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움켜쥔 그것들이 어느새 내 손에서 다 사라지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 바로 지혜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을 지혜라고 착각합니다. 아니요. 지혜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따라 합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언어의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서 최고의 언어는 바로
Ⅲ. 사랑의 말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담긴 말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 담긴 말이 있는가 하면 미움이 담긴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담긴 말이란 따뜻하고 포근하게 덮어주는 말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 말을 들으면 위로를 받고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대신 미움이 담긴 말이란 차갑고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말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고 미움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정답을 말하는데 거기에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오히려 더 아픔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내가 누구입니까? 그분 앞에 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쏟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셨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죄 사함의 은총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그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인데 나를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르므로 죄로 막힌 담을 헐어내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입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엔 조건이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기 사랑을 라틴어로 ‘아모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르’는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는 부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곧 희생이 없이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희생적 사랑 곧 아가페 사랑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도 당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는 또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이 죽음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이는 죄가 없으신 온전하신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희생하시는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 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말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우리의 가슴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사랑을 나누십시다. 비록 작은 사랑일지라도 뜨겁게 말입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또 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품격있는 클래스가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잘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이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달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말을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말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꼭 필요한 말을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살리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살 희망을 주고 살 용기를 갖게 하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도 지혜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 다.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문제 해결의 길을 열 수 있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랑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말, 위로를 전하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