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주님 안에서 만나니 정말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 교회 벧엘전에 들어오면 눈길을 끄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이웃, 행복한 가정”이라는 문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러실 겁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행복 추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권리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소위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놓을 수 없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성에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의 인생을 구가하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요즘 마약 청정국이라고 일컫는 우리나라가 왜 마약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행복 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전도서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 전해주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통찰하는 능력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지혜로 인생을 통찰하며 깨달은 말씀입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은 행복에 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Ⅰ. 행복은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불행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솔로몬이 볼 때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행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갖지 못한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그의 인생을 다 살고서 인생의 저녁녘이 되어서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복이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지혜자의 그런 깨달음을 인생의 후반기에는 누구나 깨닫는다고 합니다. 영국 어느 방송국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에게 앞으로 남은 시간이 5분밖에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질문에 어느 사람도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더 큰 일을 해보고 싶다, 더 많이 배워보겠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갖겠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용서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어떤 큰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내 일상 속에 주어진 작은 행복을 지금 누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평범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저는 요즘 코로나 전에 느끼지 못했던 목회의 행복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사업장 심방을 하면서 우리 교인들의 삶을 현장에서 보면서 자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성실히 살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에 조그마한 사업 공간에서 기도하는 행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는 이런 행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의 현장은 총성은 울리지 않지만, 전쟁터와 같습니다. 이런 현장에서 치열한 생존을 위해 살다가 이처럼 주일에 나와 예배자로 선 여러분은 정말 행복자입니다. 신 33:29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백성을 축복하며 결론적으로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백성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백성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를 40년이나 떠돌았습니다. 가진 돈이나 살집이나 농사지을 땅이 없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치러야 할 텐데, 자칫 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행복하다고 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들을 보고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모세는 뭘 보고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 40년 광야생활 동안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치를 때도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저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같은 상황 속에서 누구는 불행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누구는 행복하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깨달음입니다. 모세는 믿음의 눈을 열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Ⅱ. 행복은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솔로몬이 볼 때 불행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죽도록 고생해서 성공도 했고, 돈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도록 이루어놓고 모아놓은 것을 엉뚱한 사람들이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39: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많은 이들의 인생이 대부분 재물을 모으는데 목적을 둡니다. 헛된 일에 분요하여 재물을 쌓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돈은 내가 죽어라 벌어서 모아놓았는데 정작 그 재물의 주인은 누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까? 물론,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일해 돈 버는 것,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돈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롬5:1절을 읽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리는 삶입니다. 여기 “누리자!”는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즐기자라는 말입니다. 좀 세속적인 표현 같지만, 이것은 특권을 이야기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이 “누린다”라는 표현은 특권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이 많지 않아서 어렵게 항공료를 지불하고 첫 외국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지 않아 여비를 아끼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이 나오자 돈을 주고 사 먹을 수는 없어 두 끼를 참고 내리고 나서야 항공료에 다 포함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특권을 알지 못하면 특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누림은 믿음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던 하나님이, 멀리만 느껴지던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보혈을 통하여 나의 죄가 씻겨지자 그 순간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내 신분이 변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성령을 통해 내 삶이 날마다 업그레이드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내 수준이 바뀌게 된 이 사실 앞에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이 내 심령 안에 가득 차오릅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계십니다. 여기에 보면 같은 인생이지만, 전혀 다른 두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유형의 인생은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부름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똑같이 바빠요.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얼마나 분주하게 보내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이라든지, 또 직장과 사업, 그리고 심지어 교회 생활에서까지 얼마나 복잡한 가운데 정말 쫓기는 듯 살아갑니까? 그러나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한 인생은 쫓기는 듯이 그냥 그렇게 끌려다니며 사는 인생이고, 다른 한쪽은 정말 보람차고 영광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둘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뭐, 간단해요. 바로 부르심 때문입니다. 맥도날드는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다릅니다. 자신의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힘들어도 절대로 지치지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심지어 잿더미에 주저앉아도 재기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 만에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누리며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인생을 쫓기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누림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은
Ⅲ. 만족함에서 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솔로몬이 불행한 사람 또 하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백 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장수했습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솔로몬이 볼 때 이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졌는데 만족이 없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누렸음에도 늘 기쁨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미녀 스타였던 마릴린 먼로가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돈이 많습니다.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정말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마릴린 먼로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정말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외쳤던 마릴린 먼로와는 달리,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의 옥 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4: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사도 바울은 궁핍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12~13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그러면서도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면서도 불행했던 마릴린 먼로와는 달리, 사도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행복해했고, 감옥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장차 받을 상급을 그리면서 기대에 찬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행복의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아름다움이나 많은 돈이나 인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 사랑을 누리며 그것만이 내 인생의 참 만족임을 알았기에 남들이 볼 때는 무모한 것 같고 심지어 미친 것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기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국민일보에 아주 작은 칼럼에 이런 글이 살렸습니다. 한 사람이 40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면서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이제 나는 걱정거리가 없어. 출근할 필요도 없지, 직장 상사도 없지 서두를 필요도 없지, 얼마나 좋아? 난 정말 행복해." 그러나 이 사람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참된 행복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매이는 것이지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부부가 서로 사랑으로 매일 때,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매여 있을 때에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튼튼히 매여 있을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참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꼭 매이는 데에 있습니다. "당신 어디 갔다 이제 왔소? 얼마나 찾았는데…” "아이구 지겨워…잠시도 꼼짝을 못하게 한단 말이야." 사실은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심지어 한 달이 지나도 남편이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찾지도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입니까? 불행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소유함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존재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넘치는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 그것이 행복임을 온 땅에 선포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예배드리는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