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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그리스도인의 가야 할 길 - 사명(행 20:22-24)

작성자: 이춘구 | 등록일: 2023-02-20 | 조회: 192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뒤에 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기쁜 소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우리에게 복음은 다 세상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바라던 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 고대하던 임신했다는 소식, 공들여 추진해 오던 일이 대박이 났다는 소식,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이런 것들보다 더 기쁜 소식이 생깁니다. 그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바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그러면 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속해 있는 것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또 가족들과의 관계, 친구들이나 동료와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고, 삶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과거에 없던 새로운 관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요성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이 사명의 가치를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한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내게 밑기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흔들림이 있고, 결단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과 그 길을 가는 데 조금도 후회가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죽음? ?져도 자신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이 당당함이라고 할까요. 비장함이 감도는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그 이유는

I. "성령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옵니다. 22절을 보면 “성령에 매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사로잡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속해서 주의 사명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성령께서 바울을 잡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고후 5:1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나를 붙드셨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나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은 주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행복한 고민인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목사님 한 분은 항상  "클러지 칼라"라고 하는 성직자 복을 입습니다. "클러지 칼라" 옛날 노예의 쇠고랑을 상징하여 하나님께 노예로 매여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 예복 자체가 헌신을 뜻합니다. 놀러 갈 때 이 옷을 입고 갑니까? 놀러 갈 때 이 옷은 불편합니다. 이 옷 입고는 어디 가서 큰소리도 못 칩니다. 이 옷 입고는 어딜 가나 싸움도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농담 삼아 개 목걸이라고 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그 목걸이의 줄을 잡고 계시기 때문에 "와라" 하면 오고, "앉아" 하면 앉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입지를 않지만, 그러나 언제나 항상 그분의 손안에 있기를 사모합니다. 그분에게서 해방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마치 목걸이를 풀어놓아도 여전히 주인 곁을 맴돌고 있는 강아지처럼 말입니다.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꽉 붙잡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날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을 버리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에 꽉 잡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행복했습니까? 사랑하는 그분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매여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매여 살 때, 꽉 붙잡혀 살 때 어떤 자리에 있어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바울의 삶의 절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힐 것이고, 견디기 힘든 환난을 겪게 될 것이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물로 그 앞길을 막아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여집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명자로 가는 길을

Ⅱ.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모르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앞에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다 쏟으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때는 정말 어리석게도 잘못 알고 악을 저질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잘못 살던 인생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믿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아내가 저에게 무엇을 할 때 가장 고마운가? 요리, 안마, 이런 것보다 몇백 배 더 고마운 것은 저를 믿어주는 겁니다. 코로나의 후유증으로 잘 나가던 사업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폐업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이 기가 죽어 밤에 잠을 청하지만, 영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 옆에 누워 있던 아내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여보 내가 있잖아” 깊은 적막이 흐르는 깊은 밤, 이 한마디에 남편의 눈가엔 그만 눈물이 마냥 흐릅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절망했는데 아내가 믿어 준 것입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지식이 많은 부모,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면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의 부모님은 농촌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유학 보냅니다. 아들이 가끔 거짓말을 합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책을 사야 합니다. 쌀을 팔아 부치세요." 그 돈을 받아 아들은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시골의 부모는 전혀 모르니까 공부하는데 이렇게 돈이 드는 줄 알고 쌀 팔고, 소 팔아서 도와줍니다.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의 지성으로 계속 오는 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회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언제나 자식을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루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그만큼 배려와 용서가 너무 힘듭니다. 지금 바울은 내 인생을 여기까지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믿어주신 그 사랑 앞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 길은 잘 깔린 포장도로가 아닙니다. 그 가야 할 길은

III. 두려움과 환란의 길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 말을 원어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각 도시에서 결박들과 고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 엄숙하게 증거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 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으로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여러분도 아십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매김 하는 데 있어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또 서구 문화를 놓고 볼 때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이상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하고 만족해서 이제 좀 빠르기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왜 이런 고통의 길을 감수합니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준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마라톤처럼 달려가는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스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당시의 시대에는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면, 오늘은 유혹과 미혹을 통해서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박해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미혹으로 우리의 신앙을 변절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2:2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저항’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다며 추구하는 세속주의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결이 거대한 해일처럼 모든 사상, 가치관, 사람들의 생각을 뒤덮어버리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올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이 말씀을 붙잡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 할 길 ? 사명을 어떻게 하는가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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