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감동을 주는 청년(살전 1:1-10) 2010. 5.2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5-24 |
조회: 2261
세상에 감동을 주는 청년 살전 1:1-10. 2010. 5/23. 주일
오늘 청년 주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청년하면 그 자체로도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 청년의 날로 지키고 특별히 만 20세가 된 청년들을 성년이라는 용어로 축하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니엘. 사무엘. 바나바에 속한 청년들이 200여명 있습니다. 그들을 붙잡고 섬김이로 수고하는 청년 목장지기들이 20여명이 있고 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교역자가 3분이나 계십니다.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이들 청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청년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미래를 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여러분을 부러워하는 것은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을 '미래를 열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갑갑하게 막힌 절망스러운 현실을 밝게 열어갈 가능성 즉 시간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청년이라면 열정과 더불어 열정을 표현할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도 그 열정을 풀 시간이 없으면 미래를 열수 없고, 또 시간이 있어도 하나님 주신 꿈으로 인한 열정이 없다면 새로운 미래를 열수 없습니다. 사실 청년의 시기는 무한한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심한 좌절과 열등감 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아픔도 보게 됩니다. 나는 오늘 이 청년들에게 이 시 한편을 소개하려고합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우리는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습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실 앞에 두려움이 잇습니다. 사실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어가며 핀 꽃잎처럼 우리는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어가며 아름답게 꽃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린다고 쓰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면서 오히려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거센 비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흔들리면서도 감사해야 할 이유는 아픈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특히 2절 상반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희망을 상실한 아픔이 있지만, 이들은 그 장애를 뛰어넘어 세상에 감동을 주는 모습으로 우뚝 섰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소금과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단 3주간 머물러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믿음이 점점 성장하여 사도바울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 20년 신앙 생활하는데도 잘 안변하는데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감동을 주는 삶을 펼쳐 나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첫째,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신앙의 기본(基本)에 충실하였습니다(3-5절).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3절). 기본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총검술을 연습할 때 하루 종일, 끊임없이 반복 연습을 시킵니다. 반복훈련으로 기본 동작이 체질화되어 언제 어떠한 상황에라도 병사가 의도하는 그 동작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믿음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타오르는 불꽃에서 열과 빛을 분리할 수 없듯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실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삶과 함께 갑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일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랑의 수고”를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희생을 할 줄 아는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소망의 인내”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재림을 희망하며 인내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주님과 교회와 말씀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태도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주님 앞에서, 대인관계에서, 물질에 대해 성경적 원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고전15:10절에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였던 그의 삶은 아름답고 견고하게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태도는 은혜에 대하여 마음이 활짝 열리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태도의 소유자입니까? 은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끄는 능력이 됩니다. 청년 시기의 신앙생활은 기본기가 잘 닦여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이라든지, 요셉, 다윗을 보십시오. 그들이 한 시대를 이끌었던 비결은 어떤 환경 앞에서도 변함없는 기본에 충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둘째,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멘토(mentor)를 잘 따랐습니다(6-9절).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요즘에는 좋은 멘토. (스승, 인도자, 상담자)를 만나야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수 있다고 하면서 멘토십(mentorship)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누구를 멘토로 삼았습니까?
① 주님을 멘토로 삼았습니다(6절b). 그들은 주님을 "본(本)받은 자“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면 주님을 본받는데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② 신앙의 스승들을 멘토로 삼았습니다(6절b). 그들은 사도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1절) 같은 영적인 지도자를 본받으려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와 마음을 합할 때 축복을 받고 대인관계도 좋아집니다. ③ 환경을 통해서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6절a). 그들은 “많은 환난”가운데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배우기를 힘썼습니다. 그결과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7절에 보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기(危機)속에 있는 기회(機會)를 통해 위대한 멘토가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성실함과 열정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멘토를 신뢰하고, 따를 때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있는 위대한 멘토로 굳게 섭니다.셋째,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재림신앙(再臨信仰)으로 충만했습니다(10절).“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0절). 이 말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세속화(世俗化)되지 않고 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이 너무 세속화되어 현세적인 복만 찾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실 복에만 집중하니까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영적 흡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본능에 이끌려 가볍게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열망하는 자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의 매력은 열정입니다. 청년의 때 근육질이나 자랑하고 옷차림 Fashion 등으로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뭔가 코드가 안 맞아 보입니다. 청년들은 꿈과 비전을 찾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삶의 열정에서 오직 행복해 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광양제철소에 가면 철강석을 녹이는 고로가 있습니다. 이 고로는 한번 불을 붙이면 고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을 끄지 않습니다. 약 15년간 하루 24시간 계속 불을 붙입니다. 한번 불을 끄면 고로 안의 녹던 철강석이 굳어서 폭탄으로도 잘 처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24시간 3교대로 15년 간 계속 쉬지 않고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 고로의 불이 제철소의 심장입니다. 이 불이 꺼지면 고로도 못 쓸 뿐 아니라 제철소도 All Stop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 예외없이 마음의 고로에 불이 붙여있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축전기를 만들기 위해서 무려 2만번의 실험을 했답니다. 축전기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마음이 축전기에 불 붙어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무려 10년에 걸쳐 그렸습니다. 워낙 그 작품에 몰두해서 하루 종일 먹는 것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았답니다. 그의 마음은 이 최후의 만찬으로 불 붙어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불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열정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삶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의 불이 꺼지면 우리의 청춘은 불 꺼진 제철소 고로처럼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에 열정이 식으면 우리의 청춘은 파산되고 맙니다.
특히 우리 교회 주변에 대학가가 많습니다. 요즘은 대학마다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복음 들고 외국에 나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략을 세워 대학 안에 들어와 있는 외국 학생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어야합니다. 지금 건국 대학 안에만, 중국 학생이 2000명이나 와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청년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슬람권의 학교 침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청년들이 진의 기초를 잘 닦는 기본에 충실해서 그들에게 강력한 복음을 전함으로 이 땅에 이단이나 우상이 지성인들 심령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10여년 전부터 단기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선교 갔다 오면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선교의 장에 기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박해와 장애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문제들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그때마다 장애를 극복하는 기적들을 경험하면서 선교에 참여한 이들의 신앙이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갈망하십니까? 그러면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선교를 떠나십시오. 특별히 단기 선교에 참여해 보십시오.
이제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주님이 허락하신 네팔 땅으로 8월에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의 배낭에 무엇을 챙기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 땅에 살아가는 이름 모를 영혼들을 위한 기도수첩과 새로운 미지의 땅에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을 좇아 그 길을 떠난 것처럼 한번 더 내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출정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느냐, 내 이름이 났느냐,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울수록 중요하지 않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보다 성숙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십시다. 지금까지 잘못된 영에 사로 잡혀있었다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합니다. 또한 꿈이 없는 청년들은 이제 생각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내 인생의 선장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아름다운 삼손의 머리를 자른 것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사탄은 잘라 놓을 수는 있었지만, 다시 자라게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자신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빛으로 세상과 충돌해야 합니다. 여기에 세상의 약한 자인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영적 강자로 거듭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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