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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 삼일절(롬 9:1-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2-26 | 조회: 182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절, 독립을 간절히 갈망하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 독립’을 외치며 거대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입니다. 우리는 이제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우리 선조들의 피가 맺힌 3.1절을 생각하며 기념 예배로 드리는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주권과 언어와 영토를 빼앗긴 그 아픔을 지난 36년간 정말 뼈가 저리도록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삼일 독립운동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 사랑한 애국애족 운동의 정신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1600만명의 국민 가운데 1.3%가 한 20만명 정도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의 준비과정과 조직, 그리고 온 민족이 참여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 속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기독교인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갔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민족에게 희망을 던져 주었습니다. 국민의식을 바꾸었습니다. 미신을 타파하고, 신분제도를 철폐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하고 모든 백성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전파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지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교육을 일선에서 감당하였습니다. 100년 이상 된 근대화된 학교시설은 대부분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등 유명 사학들이 신앙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식병원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동산병원, 예수병원 등 병원을 세워 백성을 살렸습니다. 민영익을 살려낸 것도 궁중에 들어간 알렌 선교사였습니다.

3.1 운동은 이 민족과 심지어 당시 우리 주변의 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3.1운동이 있은지 10주년이 되던 1929년 인도 간디의 스승 타고르는 이렇게 한국을 노래했습니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등불의 하나였던 조선인,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무한히 퍼져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전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조선이여 이제 깨어나소서." 이 3.1운동이 전세계에 자유에 대한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민족을 이끌던 우리 한국교회는 키가 고장난 배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부흥의 기적을 이루었던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죽하면 역사가 ‘코로나이전’과 ‘코로나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명피해나 경제적 피해와 같은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첫째, 교세감소입니다. 둘째, 충성도 감소입니다. 셋째, 재정 악화입니다. 네번째, 전도환경의 악화입니다. 이 중에 우리가 가장 염려해야 할 일은 성도들의 헌신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을 다시한번 직시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기독교가 이 민족을 살리는 역할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은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그치지 않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삼일운동을 통해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Ⅰ.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어떻게 독립운동에 앞장 설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대제국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운동이 시작된 직후 그리스도인들에게 ‘독립단 통고문’이란 문서가 배포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신자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는 사 10장, 화요일은 렘 12장, 수요일은 신 28장, 목요일은 약 5장, 금요일은 사 59장 그리고 토요일은 롬 8장을 다 읽을 것이라” 이 말씀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독립 선언문을 만들고 3.1운동을 주도했던 분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남강 이승훈 선생님을 이야기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남강 이승훈은 수 차례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고 당당히 나아갈 때 이민족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 속에서도 3.1운동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Ⅱ. 두려움이 없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은 두    움입니다. 딤후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1)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당시 3.1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죽음과 핍박 앞에서도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는 당시 이화학당 재학생이었습니다.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일제에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견뎌내다 결국 18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순교하고 맙니다. 유관순 열사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 전해집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일본을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중략)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이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도대체 이 젊은 학생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믿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이 보아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가슴을 안고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을 향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3.1운동은


Ⅲ. 연합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당시 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역사 가운데 다시 찾아보기 힘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연합입니다. 만세운동에 온겨레가 다 힘을 합해서 참여했던 것입니다. 우선 상해에 망명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일본유학생들도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2.8독립선언 사건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삼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서북지역에서 시작하여 서울, 호남, 영남, 강원 등 전국적으로 퍼져갔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던 지역감정 문제를 뛰어넘어 하나를 이루는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국내의 모든 정파와 세력들이 하나가 되어 참여했습니다. 후에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정쟁을 일삼게 되었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양반후손과 천민 후손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남존여비가 사회 저변에 그 힘으로 작용하던 시기에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안에 남아있던 분열의 요소를 하나로 묶어낸 용광로와 같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도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왜 시위 날짜를 3월 1일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돌아가셨고, 3월 3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날짜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민족대표 33인은 이날 장례식에 참여할 사람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를 거듭하다가 자칫 폭력시위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서 3월 2일로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3월 2일이 주일입니다. 이 때 천도교에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고려해서 3월 1일로 앞당기자고 제안해서 3월1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 삼일운동이 종파와 종교를 뛰어넘어 연합을 이루어낸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3.1 운동의 역사적 자료를 보고 정리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정복이라는 야망을 품고 칼을 갈고 있었을 때 우리 조상들은 당쟁을 일삼고 있었고, 우상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본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무력으로 우리의 국권과 강토를 빼앗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짓밟으면서 민족의 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끌려가 동남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아직도 일본은 뉘우칠 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온 민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찌에 의해서 600만명이 학살된 것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야드바심’이라고 붙였습니다. ‘야드바심’이란 말은‘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백악관 건너편에도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후손들이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어려움을 잊고 살면 망한다는 것을 뼈 져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 살고 있진 않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사건이 터지면 쉽게 흥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근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아픔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그 고통에서 이 땅에 해방을 위해 비폭력으로 삼천리 방방 곡곡에 태극기를 들고 외치며 수많은 우리의 선열들이 죽음으로 항거한 이 3.1절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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