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우리가 코로나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마스크로 단지 벗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서서히 코로나의 길고 어두웠던 터널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긴장의 끈을 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기를 힘쓰지 못했습니다. 말은 바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사태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회도 그렇고 성도들 자신도 스스로 양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이전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다시 모이기를 힘쓰며 또 맡겨주신사명에 그 전처럼 헌신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안에 영적인 태만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에게 영적인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태만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심할 경우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믿음이 흔들리고 믿음의 가문의 대가 끊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여일 동안 회개와 기도, 절제와 금식, 그리고 깊은 묵상으로 경건에 힘써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에 힘쓰며 집중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믿음을 상실하고 점점 세상에 변질되어가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당시의 로마제국이라는 세상적인 위협과 유대교라는 종교적인 위협 속에서 어떻게 투쟁하여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우리가 처한 세속주의와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승리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답은 한마디로 먼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바라보며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정신을 다른 데 쓰지 않고 한군데에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아침 무엇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바로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내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I.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라는 이 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입니다. 딤후 1:9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의 행위대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고 살아갑니다.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은혜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은혜는 사람을 매력있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아름다워지고 매력적이게 됩니다. 외모도 그렇게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삶속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은혜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아무리 많아도 부작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삶은 황폐해집니다. 그리고 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는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르신 분의 소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 43:1절에 보면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에 '주여'라는 말이나, 영어로 'Lord'라는 이 말은 '나의 주인이여'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책임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한복음 6:37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소유된 자를 결코 버리시지도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시편 17:8에 보시면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눈에 먼지가 들어올 때는 내 눈동자가 신속하게 움직여서 먼지를 차단해서 눈을 보호합니다. 이사야 41:10에 보면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0:28에 보면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당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지금 너희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존재라면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II.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두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와 대제사장 입니다. 여기 사도란 본래 "아포스를로스' 라는 말인데, 사명을 지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사명을 지워 보내신 사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신 그 겸손과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한없는 용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눅13:33절에 보면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영어 성경에 보면 'must be' 반드시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사도로서 반드시감당해야 할 일 -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 27:46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로 사명을 지워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대해 주시며 살리신 것입니다. 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히부리서 저자는 예수님은 사도이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대제사장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가슴에 품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 죄를 고하고, 하나님께로부터죄용서의 은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했습니다. "매년 반복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에 매년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은 히 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별의 별 일을 다겪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은 그런 것들을 겪으신 이유가 나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우리를 동정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정이라는 말은 ‘같은 아픔을 겪다'라는 뜻입니다. 3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한 아버지가 지하철에 탑니다.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우니까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3일전에 이 아이의 엄마가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아이를 외가댁으로 데려가는 길인데, 떨어지지 않겠다며 이렇게 우는데 막을 길이 없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지하철 안의 어떤 사람도 더 이상 아이 아버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로는 웃지만 마음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피부는 깨끗하지만 마음의 피부는 멍들고찢어져있습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서로를 ‘같은 아픔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상처는 사람의 아름다운 본성을 가리지만, ‘같은 아픔을 느끼'는 긍휼의 마음으로 상처를 감싸주고 보듬어 줄 때야 비로소 본래의 아름다움을 꽃피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자로 오신 여러분 가운데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부도가 나거나 실직을 하여 마음의 태풍이 몰아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미래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한 분도 있을 줄 압니다.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눈물짓는 우리를 당신의 포근한 품에안아 주십니다. 이 아침, 그 예수님을 우리는
III.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후쿠하라 마사히로라는 분이 쓴 '하버드의 생각수업'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계최고의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생각은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을 찾아가면서 생각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위해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힘겹고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반복된 하루를 쫓기듯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사색하기보다는, 생각하기보다는 검색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좀 생각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 과정에다 생략이 되어지고 우리 손안에 들려있는 스마트 폰을 붙잡고 그냥 검색합니다. 거기 답이 다 있고, 검색해서 찾은 내용을 그대로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이가 든 분은 좀 불편하지만, 이젠 이 작은 스마트 폰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6년도 해외 리서치 기관인 ‘디스카우트’의 보고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스마트폰 이용자는 하루 평군 2,617회를 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사용자는 일반 사용자의 두배인 5,400번 이상의 터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평균 100만번 이상 스마트 폰과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은 지금 세대들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소통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이 즐기고 좋아하며 자랑하고 싶은 사진이나 영상을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며 다수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2,617회 이상 열어보고 있는 스마트 폰의 작은 화면 속 그 어디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친밀감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서로를 안아주고, 서로를 만져주며, 서로를 위로해 주며 울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귀가 떠다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이렇게 살다보니 생각 없이 살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대충 그리고 막살게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은 자는 모두 소명자입니다. 인식하고 있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소명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라고 그렇게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아니라, 왜 열심히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소명의 출발입니다. 구원 안에는 우리 삶에 대한 소명이 들어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면 당장 우리 안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구원 받은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이전과 똑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구원사건의 분명하면 소명도 같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사건이 분명하게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부르심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서 십자가와 마주할 때 못나고 연약한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선 자들은 주님께서 나하나를 위해 당신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 내 삶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은 단 한 구절입니다. 1절을 암송하세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 할찌라도 이 모든 과정은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경기도 이천의 한 도자기 공방을 둘러본 일이 있었습니다. 매장에 한 눈에 봐도 멋지고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광택이 오묘한 색과 함께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켰습니다. 안으로 들어 가보니 장인들이 도자기를 빚고있었습니다. 모양이 갖춰있고 무늬와 그림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볼품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안내하는 분 말씀이 이제 이것들이 1500도 이상의가마에 들어가 구워져야 작품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도자기들이 가마 속의 그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올 때, 멋진 작품이 되듯이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잘 이겨내면 더 멋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매력이 넘치는 자들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모두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