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 있었는가?(요 19:23-2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3-12 |
조회: 219
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작품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제목의 단편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보그라는 마을에, 마음씨 착하기 그지없는 곱추 우그린이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데다가 어머니는 중증의 알콜 중독자였기에, 누나인 소랑케가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으며 곱추 동생 우그린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소랑케는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랑케는 몸을 팔아 곱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을 때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대었습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다 똑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에 수도사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곱추 우그린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랑케와 우그린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수도사는 '이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습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가 거행되는 마을 예배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례를 집례 하는 수도사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소위 기독교인들이여,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곱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수도사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수도사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런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를 향해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이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단입니다. 여러분은 해마다 아니면 필요할 때 다 받는 것이 건강진단입니다. 그런데 검사 도중에 내 몸 안에 악성이 발견되었다면, 그 소식 앞에 충격이 클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우리를 진단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이 말씀은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리 삶에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를 소홀히 여긴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핵심을 놓칠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경험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신앙의 첫걸음은 죄 문제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확실히 다루지 않으면 종교생활에서 멈추게 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종교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신앙 안으로 들어가려면 죄에 대해서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주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 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 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번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은 만왕의 왕이 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아픔입니까?
세번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수치를 다 담당하시고 마침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신 그 십자가 앞에 한 일이 무어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작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주님의 십자가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있지를 않았습니다. 정작 주님의 고통의 현장에는 지난날 은혜받은 자들은 다 가버렸습니다. 한때는 자신의 전부와 다름이 없는 겉옷까지 벗어 주님을 맞이했던 군중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참 충격인 것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 35) 장담하던 베드로도 그 자리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이 바뀌자 주님을 버리고 배신한 제자들이나 군중들의 모습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에는 좋은 하나님이라고 힘껏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다가도, 내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들이닥치면 찬양하던 목소리가 원망의 소리로 바뀌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경험했을 때에는 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릴 것만 같다가도, 그 감격이 식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기적인 태도로 돌변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메마르면 반드시 쓴 뿌리가 고개를 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성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만들 것입니다. 쓴 뿌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고갈되면 말라버리면 우리는 매우 흉몰스러운 인생이 되버립니다. 여러분, 신앙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늘 성숙해져야 합니다. 환경 때문에 흔들리고, 감정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온전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지금 아직도 구원의 그 엄청난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면 이 시간 성령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쏟으신 그 사랑은 우리의 입으로 다 표현할 수 조차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새는 날개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떼어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개 때문에 날아 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는 돛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잘라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돛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부패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구원의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우리 인생에 있어서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저는 설교 시작 때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이야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수도사의 외침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외침은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리떼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절망하고 탄식하는 까닭은 하나―인간은 본래 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동생 아벨을 단지 시기심으로 쳐 죽였던 카인이 이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한 목숨 살겠다며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다가 그 아내를 빼앗겼었던 아브라함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굽인을 때려 죽였던 모세가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삼촌을 교묘하게 속여 삼촌의 재산을 횡령하여 부정축재했던 야곱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충복의 아내와 몰래 통정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예 충복을 살해해 버렸던 다윗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도대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 중 본래 이리가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으시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가십시오.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이야기,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복음의 핵심이요, 은혜의 샘입니다. 모든 은혜는 여기서부터 흐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거기 너 있었는가’ 물어보십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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