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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십자가와 나(고전 1:17-2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3-19 | 조회: 254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의 옷을 보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 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변화에 무심할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꽃샘추위로 장롱에 들여놓았던 두꺼운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들이나 산에 생명이 있는 것들이 기지개를 키고 생명의 약동하는 모습으로 봄의 계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새봄은 우리로 하여금 움추렸던 현실에서 보다 진지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줍니다. 이렇듯 계절에 바뀜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이 자리에 있으며, 장차 무엇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일컫는 스펄젼 목사는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주일에 교인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수없이 이 강단에서 들었던 꼭 같은 메시지를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전하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 이것 하나 다시 전하고 저는 가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설교한 다음에도 15년이나 더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정말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가 더이상 예배할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Ⅰ. 십자가에 대한 이해

바울이 살던 당시 세계의 3대 도시는 로마, 고린도, 에베소였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가 약 100만, 고린도 시는 절정에 인구 75만을 거느리고 있었고 에베소가 50만이었습니다. 바울은 아직 로마에 갈 상황이 못 되었고 그렇다면 바울이 어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렇습니다. 에베소와 고린도였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 이상 그리고 그는 고린도에서 약 1년 반(행18:11)을 머물며 선교한 것입니다.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가 시민들을 세속화시키던 대표적 도시였습니다.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이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의 동의어였습니다. 이러한 세속에 찌든 고린도 도시의 한복판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저놔는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란,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사람의 죄를 씻고,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구원의 길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먼저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거리낀다는 말은 영어 번역에 스캔들(Scandal)이라고 말합니다. 불미스런 소문을 뜻하는 말입니다. 왜 스캔들입니까?
 
자! 묻습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인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나요? 내가 십자가에 예수를 메달았는데 ‘죄인의 괴수’라는 패를 만들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는데 자신들이 죽인 그 예수를 어떻게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나요? 그러므로 저들이 구약시대부터 갈망하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장본인인데 그것을 쉽게 인정하겠습니까?
 
그리고 23절 하반절에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중요시하는 헬라인에게 바울의 복음 메시지는 천박하고 무식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은 십자가형은 로마에 대해 반란죄를 저지른 괴수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노예를 처형하던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니,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미련하게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거나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Ⅱ.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확고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도’ 이 십자가의 말씀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이 탄탄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가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고급장교인 천부장도 ‘그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돈을 주어 그것을 샀노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행22:28) 많은 돈을 주고서라도 꼭 가져야 하는 것이 로마시민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이미 가졌습니다. 태어난 배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수저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자기 훈련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학문에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인 베스도는 사도 바울을 향해서 행전26:24절에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태어난 배경이나 자라난 환경과 스펙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유대교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초대 교회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의 씨를 말렸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과 스펙을 버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3:8절을 보세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의 인생을 복음 앞에 다 꾸었습니다. 그는 고전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이런 각오를 하고 거대한 세속에 물든 고린도 도시를 향해 외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십자가 너머 부활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그는 말로만 그렇게 외치지 않았습니다. 다메섹 동상에서 예수를 영접한 이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앞에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으시고 자녀 삼으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 남은 여생을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갑니다.
 
보세요.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모습으로 여기고 헬아인은 미련하게 여기는 이 세속의 도시인 고린도 도시 한 복판에서 외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 안에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 열쇠가 있다는 것입낟. 이것을 지혜와 능력이라 표현 했습니다. 오늘 날 이단이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이요 지혜라고 떠들어 댑니다. 아닙니다. 이 십자가의 도안에 다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세상이 이 손안에 있소이다.” 자기 손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책략가이자 모사꾼으로 한명회가 한 말입니다. 계유정란을 통해서 수양대군을 조선 7대왕 세조로 옹위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거사 전에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만나 나눈 대화가 유명합니다. 수양대군이 이렇게 묻습니다. “한주부는 세상을 어찌 보는가?” 한명회가 이렇게 답합니다. “이 손 안에 있소이다.” 명회는 당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꿰뚫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충신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밀어낸 뒤 수양대군을 왕으로 세울 수 있을지 그 책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가 자기 손안에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한명회는 끝까지 권력을 탐하다가, 성종 때 탄핵을 당해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연산군 때는 이미 죽은 뒤지만, 역적으로 몰려 부관참시를 당하는 참담한 꼴을 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고 큰 소리 칠 만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 모든 것이 결코 내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손, 바로 십자가의 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Ⅲ. 십자가와 나

기독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교훈과 원리들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인간 구원을 위한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덮어 버리면 신앙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이나 활동들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야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봉사를 많이 하고 활동을 많이 해도 십자가가 빠지면 세상 단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너무 오랫동안 살았습니까?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모든 죄를 다 도말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를 많이 하셨습니까? 여러분, 남 모르게 더러운 생활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더러운 생각으로 날마다 들끓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못 고칩니까?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십자가 앞에 와서 피 흘리시는 주님의 옷 자락을, 주님의 발목을 잡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더러운 음란한 죄라도 간음한 죄라도 다 씻어 주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법을 사하시고 영원히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지하게 십자가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내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직도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부끄럽습니까? 이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자랑스럽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십자가 안에 우리 인생에 모든 해답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온 세상에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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