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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무엇을 구하느냐?(요1:35-3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3-26 | 조회: 277
우리 교회에도 다녀 가셨던 김상붕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때 장면 총리를 저격하고 사형 언도를 받은 분이 목사가 되어 28년 간 한 교회를 사역하고 정년이 되어 은퇴하실 때 자신 안에서 겪었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승만 시절에 당시 그는 이화수, 유지광, 이정재, 조봉암 같은 사람들과 같은 감옥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출소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 개척을 하다가 난지도에서 빈민들과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하던 사역을 놓게 된다고 생각하니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외동딸이 아버지 옆으로 조심스럽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두었다고 합니다. “아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무대에 있을 때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야!” 그러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한 길에만 쏟은 사람들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가 물러나는 때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영웅처럼 나타났다가 졸장부처럼 사라지는 자들을 왕왕 봅니다. 그들 대부분은 물러가야 할 때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머뭇거린다거나 사리사욕에 빠져 추태를 부리다가 만인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보기에 얼마나 민망한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세례 요한은 정말 훌륭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명예를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까지 전부 예수님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의 권유로 예수님께 다가 왔을 때 주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 무엇을 구하느냐 37-38 상반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여기 예수님을 따르는 두 제자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자기를 찾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무엇을 구하느냐는 이 말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명성이 자자한 너희 스승을 따를 것이지 무엇 때문에? ? 나를 따르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은 꾸짖는 것이 아니라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빵과 고기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세상 소욕을 위해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그 위대한 스승을 뒤로하고 왜 나를 따르려냐 하는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그 위대한 스승인 세례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발걸음을 옮겼던 그들은 무엇을 원했기기에 예수의 제자가 될려고 했습니까? 만약 말입니다. 이들이 출세를 원했다면 당시 유대사회에는 유명한 신학교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교 )힐렐 신학교입니다. 여기에 입학하여 얼마든지 학문을 연구하면 그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르는게 아닙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던지는 질문인 ????무엇을 구하느냐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6장에 보면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6:26에 보면????너희가 나를 쫓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했습니다. 정말 주님이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어린양 예수를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떡 때문이었습니다. 52어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단순히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시는 주님만을 알았습니다. 아니지 않습니까? 그 표적을 보여준 것은 떡이 아닙니다. 생선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벳세다 들녘에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는 그 분이 어린양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리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모여 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바라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자기들 생각이나 기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심한 경우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고 환호하며 몰려들었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안 돼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삼아주신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자라는 말은 성경원어 마테테스’(μαθητηs)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는 자기 스스로 주님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사람들은 사도로 세움을 받아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리와 같은 교인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와 같은 교인입니다. 무리와 같은 교인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생각한대로 안되면 미련없이 떠납니다. 헌신도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와 같은 교인은 받은 은혜 앞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코로나사태를 지나면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점점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리와 같은 교인들은 코로나사태 속에서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제자와 같은 교인들은 코로나사태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마16: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은 정말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이십니다. 보잘것없는 미물도 깃들고 거할 처소가 있는데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짐승이 머물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또 당시에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가난한 동네, 소외된 것으로 알려진 나사렛출신입니다. 그의 이력서를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매력이 없는 인물이요, 아무런 기대치를 걸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다가온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 어디 계시오니까? 38 하반절
 
그 때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합니다.????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38F) 동문서답 같지 않습니까? ‘무엇을 원하느냐는데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어디계시오니까?'라는 대답 속엔 그들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어떤 조건때문이 아니라????본질????????주님????이었습니다. 그들의 구하였던 것은 어떤 축복이 아니라 축복을 베푸시는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깊이 깨달았습니다.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양이로다???? 36절에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보라 하나님 어린양"이라고 외칩니다. 이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드려지는 희생양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아갈 때 자신들은 속죄할 제물은 어린양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어린양은 장차 오실 구원자인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 앞에 계신 이 예수께서 바로 나와 우리와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임을 당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소망하던 메시야다, 참 진리며 참 빛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영생입시다????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상 적인 출세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겠다는 그 각오로 어디 계시오니이까하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 새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 39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본문 40절을 보면 한 사람은 안드레라고 그 이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었을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들은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와도 변질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시대를 복음으로 변화의 장을 열어갑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제자 그들 안드레, 그는 주님을 만나자 자신의 집에 형제 베드로를 전도합니다. 이 전도를 통해 복음의 생수가 온땅에 펼쳐 나갑니다. 그리고 요한 그는 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이끌었습니다.
 
묻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은혜 앞에 내 인생이 내 삶이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이라면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나를 주님의 종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사순절에 십자가 앞에서 나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부족한 종의 소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예수님이 피 값 위에 세워진 교회, 사도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세웠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를 열망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그렇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고독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좌절하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께 붙잡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치유가 됩니다. 신앙의 방황도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그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감격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말씀을 들으며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주앞에 드리고 싶은 열정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다음 주는 고난 주간입나다. 우리는 한주간 새벽마다 엎드려서 기도 하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승리합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공입니다. 십자가는 모욕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은총의 기쁨입니다. 십자가는 절망이 아니라 최후의 희망입니다. 십자가는 어둠이 아니라 광명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 주님의 뒤를 따라 사십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서울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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