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여호와의 종의 노래(사 53:1-1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4-02 | 조회: 245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었는데, 이 때 군중들이 흔든 나무 가지가 종려나무였기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백성들의 환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마21:10절에 보면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가 들떴습니다."소동하다"는 단지"웅성거리다"부산하게 움직이며 말하다. 정도가 아닙니다. 이 단어가 "세이오'인데, 마태복음 27장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에 하늘이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바위가 터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땅이 ’진동하다‘소동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온 지축이 뒤흔들리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뒤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를 이처럼 온 성의 사람들이 열열이 환영을 한 것입니까?

눅 19:37절을 보면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여기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 때문입니다. 이는 최근의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평생을 돈의 노예로 살았던 삭개오을 찾아가셔서 그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을 찾아와 준 것이 그토록 감격이 되었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자의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지 4일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현장에는 제자들은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본 것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음에도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환호성을 질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말로는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 이 노래는 절박한 심정이 담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은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는 구원의 열망이 아니라 단지 그들 눈앞에 비쳐진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고, 포악한 인간의 대명사였던 세리를 바꾸어 놓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이미 장례까지 치른 시체를 살려내는 분이라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왕이라고 여겼던 예수가 로마에게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월절 특사 선택에서 엄청난 죄인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주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정말 같이 있어주고, 아파해 주고, 눈물 흘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은 홀로 그 고통과 수모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일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무너지면서 실망감이 찾아오고, 결국 이들은 폭도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군중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치기 바빴고, 3년이나 따라다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데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 오시기 700 전에 이사야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보는 듯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00년 전에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마치 자신이 만나고 본 것처럼 오실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를 소개합니다. 이 모습이 너무도 사실적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오신 후에 학자들이 편집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어느 날,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 쿰란에서 양과 염소를 치던 젊은 베두인 목동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가 양을 한 마리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길을 잃은 자신의 양이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동굴에 돌을 던졌습니다.

동굴 안에는 깨진 항아리를 포함해 모두 아홉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었습니    .항아리 속에 누군가 숨겨둔 보물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모두 비어 있었고, 오직 한 항아리 안에서만 보물이 아닌 열한 뭉치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베드윈의 눈에 그것은 보물도 아니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윈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푼돈을 받고 중고품 상인에게 팔아넘겼고, 그 중고품 상인은 그것들을 히브리대학교와 그리스정교회 어느 수도원의 주교에게 나눠서 팔았습니다. 그들이 헐값에 팔아버린 그 두루마리 뭉치가 바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입니다. 이 사해사본은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불릴 만큼 성경연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문서입니다. 여기에 생생하게 이사야 서신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 사해 사본은 적어도 예수님이 오시기 200년 전에 사본입니다. 그러니까 신신학자들의 견해가 얼마나 잘 못 되었는가를 알려 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5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2장 13절부터 먼저 보아야 합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여기에서 "보라"는 단어는 새로운 대상을 지적할 때나 감탄사로 쓰입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아오실 때 요1: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3:1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70번이나 '보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는 주목해야할 대상을 말해줍니다. '종'을 보아야 합니다. 직접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형틀에 희생의 제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종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인류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할 종은 인류를 위해 고난당한 종입니다.

1. 비천한 인간이 되신 종이 되셨습니다. 2-3절을 보시죠.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무슨 말입니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랬죠.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은

2. 대속의 제물이 되신 종으로 오심을 이야기 합니다. 5절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에 찔리고, 창에 찔리고, 못에 찔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고통이 무엇 때문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무죄한 하나님이 아들이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그렇게 된 겁니다. 6절에서 그 사실을 다시 지적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마치 양과 같다는 겁니다. 양은 온순해 보이지만 아주 고집스럽고 미련한 동물입니다. 게다가 눈이 나빠서 먼 데를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챙겨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 멋대로 갑니다. 인간이 양과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떠안으시고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전적으로 모든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대속이라 부릅니다. 죄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입니다. 이 메시야인 종의 수난은 결국 우리의 구원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6;17절에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가졌다고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 곧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그 십자가의 흔적은 우리가 누리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출세하고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십자가의 흔적이 아닙니다. 내 삶이 평안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지는 것이 내 삶에 있는 십자가의 흔적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에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이제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에 동참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을 때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이 의미를 되새기며 지난 날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제 곧 작별하실 것을 아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예수님 심정이 어땠을까요? 떡을 돌리면서 '이 떡은 말이야 너희들을 위해서 내일 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말이야 내일이면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게 될 나의 보배로운 피야.'

이런 심정으로 잔을 나누시던 우리 주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 전체를 내어주신 주님. 그의 피 흘림, 그의 자신을 내어주심, 그의 전부를 내어주심, 그의 희생 때문에, 그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